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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14
한자 考古學-寶庫-博物館百濟歷史遺跡地區
영어공식명칭 Archaeological Reporting, Roofless Museum Baekje Historic Area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충청남도 공주시|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7월 -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와 충청남도 공주시·부여군에 분포하는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

[개설]

‘고고학의 보고, 지붕 없는 박물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라북도 익산시와 충청남도 공주시·부여군에 있는 백제 후기의 대표적인 유적지 8곳을 가리킨다. 그중 익산시는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과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등이 해당된다.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는 유산으로 유네스코가 제시한 문화유산의 6개의 등재 기준 가운데 하나 이상을 충족하고,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을 갖추어야 한다. 세계유산 중에서도 ‘문화유산’은 기념적 의의를 갖고 있는 회화 및 조각이나 유물 혹은 기념물, 독립된 또는 연속된 구조물로서의 건조물군, 고고학적 유적을 포함한 유적지라는 세 개의 영역으로 범주화된다. 2015년 7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 범주 가운데 ‘유적지’에 속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익산시의 미륵사지왕궁리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적 지구가 2개 도와 3개 시·군에 걸쳐 있으므로 연속유산에 해당된다.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증명하는 유산]

전라북도 익산과 충청남도 공주, 부여에 흩어져 있는 8개 유산은 모두 백제의 왕도였거나 왕궁이 있었던 곳에 있다. 왕도와 왕성은 한 나라의 중심 공간으로 역사의 전개 과정과 문화의 핵심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8개 유산의 성격과 기능은 통치 공간, 이념 공간, 사후 공간, 외곽 성으로 나눌 수 있다.

통치 공간은 왕성과 왕궁이 중심이다. 여기에는 공산성,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왕궁리 유적이 포함된다. 국가 통치의 이념을 보여 주는 공간은 사찰이다. 여기에는 정림사지와 익산 미륵사지가 포함된다. 선왕과 현재의 왕을 정신적으로 연결시켜 주며 왕실의 권위를 보장하는 사후 공간이 능묘이다. 여기에는 송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고분군이 포함된다. 부여 나성은 도성을 둘러싸서 성 안팎을 구분하면서 방어 기능을 하는 외곽 성이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수준 높은 문물을 신라, 가야, 왜[일본] 등에 전해 주어 그 나라의 문화 수준도 높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하여 확인된다.

백제는 한성기에 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는 웅진기를 거쳐 사비기에 크게 성행하였으며 이후 백제 불교는 주변국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신라가 불교를 공인할 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 공인 후 신라에서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세우면서, 기와 건물이 정연하게 배치된 본격적인 가람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645년 신라가 황룡사 구층목탑를 만들 때 장인 아비지를 파견하여 목탑 건립을 돕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는 백제가 창안한 석탑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통일 이후에는 석탑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한국 불교 문화의 한 특성을 형성하게 된다. 백제는 538년 왜에 불교를 전하면서 승려를 비롯하여 사찰과 탑, 기와를 만드는 기술자들도 함께 파견하였다. 그 결과 왜의 불교 신앙과 문화, 건축은 백제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가 백제 승려와 장인에 의하여 세워졌다는 사실,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의 가람 배치가 탑-금당-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탑·금당 가람 구조라는 사실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야마다데라[山田寺] 금당 기단에 보이는 와적기단(瓦積基壇)은 백제에서 창안한 와적기단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웅진기에 벽돌을 쌓아 만든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중국 남조의 벽돌 무덤을 받아들인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중국산 도자기와 오수전, 묘지석, 진묘수 등은 중국의 장례 문화가 백제에 전해진 것을 잘 보여 준다.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목관은 왜와 백제와의 교류를, 동남아시아산 구슬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를 증명한다. 무령왕릉 출토품은 백제가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구체적인 증거가 되며 문화 교류의 강국임을 잘 보여 준다.

웅진기를 거쳐 사비기에 이르러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더 이상 유행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사비기에 크게 성행한 지배층의 무덤은 굴식돌방무덤이다. 무덤의 현실에는 잘 다듬은 판석을 사용하였으며 내부 구조는 종래의 궁륭상 천정에서 단면 육각형의 구조로 바뀌었다. 단면 육각형의 구조는 매우 안정적이고 균형미가 있는 아름다운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을 능산리형 돌방무덤이라 부른다. 능산리형 돌방무덤의 단면 육각형 구조는 안정되면서도 백제가 처음으로 창안한 것인데, 일본 열도에 전파되어 유행하기도 하였다. 웅진기와 사비기에 만들어진 일부의 왕릉급 고분에서는 벽화가 남아 있었다. 송산리 6호분에는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능산리 동하총에는 네 벽과 천정에 각각 사신도와 연화문도가 그려져 있다.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중국 남조나 고구려의 영향이다. 남조의 벽화는 벽돌로 구워 조립한 형식이지만 송산리 6호분의 경우 벽화를 그릴 곳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렸다. 이러한 기법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백제는 중국의 왕궁과 도성을 만드는 제도를 받아들여 익산 왕궁리 일대에 전조후원형(前朝後苑型)의 궁궐을 만들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후원에서는 연못과 정자 및 도수로가 확인되었다. 백제의 원지(苑池) 문화는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 고대 궁원(宮苑)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고대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이룩한 인류의 중요한 가치의 교류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판단하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건축물과 건축 기술의 발전을 가져온 교류는 백제의 성곽 건축, 왕릉, 석탑, 건축물의 기단에 잘 나타나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문화적 전통과 문명의 독보적 증거가 되는 유산]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산성 안에 왕궁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비로 천도하면서 평지인 관북리 일대에 왕궁을 만들고 뒤쪽인 부소산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후원의 역할을 하면서 유사시에는 피난성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의 왕성 구조는 한성기의 전통을 이은 것이며, 고구려와도 공통된다. 백제는 왕성과 나성을 만들면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공주 공산성은 금강과 공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부여 나성은 백마강을 자연 해자로 삼아 산과 계곡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여 만들어 중국의 나성이 평지에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다. 이처럼 자연 지형을 잘 활용하여 왕성과 나성을 만든 것은 백제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왕궁과 도성 건설에는 다양한 기법의 토목, 건축 기술이 적용되었다. 공산성과 부소산성, 부여 나성에서는 성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판축공법(版築工法)이 사용되었다. 부여 나성의 경우 저습지 등 연약 지반에는 부엽공법(敷葉工法)을 사용하여 성벽을 견고하게 하였다. 토심석축 공법은 중심 토루를 만들고 바깥에 돌을 덧대어 방어력을 강화한 것인데, 웅진기에 공산성 축조 때 창안한 독특한 축성 방법이다. 이러한 축성 방법은 사비기에도 이어졌다. 판축 기법과 부엽공법은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기술인데 백제가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발전시키고 개발한 기술을 백제는 왜에 전해 주었다. 일본 오사카 사야마이케[狭山池] 제방의 발굴에서 확인된 부엽공법, 규슈 지역 미즈키[水城] 등의 발굴에서 확인된 판축 기법 및 부엽공법은 백제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의 건축, 토목 기술이 왜에 전해져 왜의 기술 문화 수준을 높였음을 증명해 준다.

백제의 우수한 문화는 석탑 건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을 석재로 변용하여 만든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이를 더욱 발전시켜 만든 것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비례미와 정제미를 갖춘 대표적인 탑이다. 두 탑은 백제의 빼어난 석조 기술을 잘 보여 준다. 백제가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석탑은 신라에 전해졌고 석탑 조영 전통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 한국 탑파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한국의 석탑 문화는 중국의 ‘전탑 문화’나 일본의 ‘목탑 문화’와 크게 대비된다. 그 시작이 바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가람 구조이다. 이를 일탑 일금당식 가람 배치라 부르며 정림사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정림사는 이후 한반도 및 일본 열도의 가람 배치의 토대가 되었다. 한편 익산 미륵사지는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이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용화삼회(龍華三會)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발굴 조사로 확인된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는 익산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도시 계획, 지형적 환경, 건축물과 기술들은 유적의 규모와 유형에 의해 증명되며, 백제왕조의 독특한 문화, 역사, 종교와 예술의 뛰어난 증거를 보여 준다.”라고 평가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완전성과 진정성]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함과 동시에 완전성과 진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 웅진·사비 시기의 왕궁, 고분, 산성, 사찰 유적들을 포함하며 백제 당시의 도시 계획, 상장 의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내용을 보여 준다. 이 유적들은 목조 건물의 특성상 건축물의 상부 구조는 남아 있지 않지만 건축물을 받치는 하부 구조는 지하에 고스란히 잘 남아 있어 전체로서의 유산이 지녀야 할 필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 유적들은 수도의 역사적 기능과 환경과의 관계를 보여 줄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이다. 그리고 이 유산에는 고려 시대 정림사지의 재건과 활용, 조선왕조에 의한 공산성과 부소산성의 보강과 활용과 같은 후대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하부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유적에서 백제 시대의 유적들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진정성은 유산의 속성이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잘 반영하였느냐를 측정하는 것이다. 운영 지침에 따르면 “유산은 그들의 문화적 가치가 다양한 속성을 통해 진실되고 믿을 만하게 표출된다면 진정성 기준을 만족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왕궁지와 고분들은 학술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한 후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학술적인 고증과 자문을 거쳐 복원을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 지하 유구의 보존을 위하여 흙을 덮고 위에 잔디를 심었다. 익산 미륵사지 동탑은 동탑지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 조사와 고증을 거친 다음 원자재 일부와 전통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원형으로 재건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은 일부가 붕괴된 채 6층까지 남아 있었는데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해체한 다음 전통 석탑 축조 방식에 따라 보수가 이루어졌다.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무왕 대에 탑에 봉안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호]와 사리봉영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 유적은 각각 다른 정도로 후대 사람의 손길에 따른 영향을 받고 있으나, 이러한 후대인들의 손길은 수리와 복원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에 그치고 있으며, 수리와 복원도 학술적인 고증과 자문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백제 당시의 유적은 지금 지하에 잘 남아 있다. 따라서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각 유산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은 전반적으로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익산과 세계문화유산의 미래]

‘고고학의 보고, 지붕 없는 박물관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익산은 왕궁리 유적미륵사지 등 2곳이 해당한다. 익산의 백제 유적들은 백제 국가가 도달한 왕도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 주며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사 문화 경관이 가장 잘 남아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된 왕궁리 유적미륵사지 말고도 익산 쌍릉제석사지, 익산 토성[오금산성] 등은 통치 공간인 왕궁, 국가 통치 이념을 보여 주는 사원, 왕실의 권위를 보장하는 사후 공간인 능묘, 방어 시설인 성곽에 대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익산의 백제 유적과 유물들은 ‘백제’라는 고대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며 추가 확장 등재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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