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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497
한자 金堉不忘碑
영어공식명칭 Kimyuk Memorial Ston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함열리 47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은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80년 - 김육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58년 - 김육 사망
건립 시기/일시 1659년연표보기 - 김육 불망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12월 14일연표보기 - 김육 불망비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 지정
현 소재지 김육 불망비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함열리 477]지도보기
성격 석비
관련 인물 김육
재질 화강암[기단]|대리석[비신과 이수]
크기(높이, 너비, 두께) 163㎝[높이]|82㎝[너비]|27㎝[깊이]
소유자 익산시
관리자 함라면
문화재 지정 번호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비석.

[개설]

김육 불망비(金堉不忘碑)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1580~1658]을 기리기 위하여 1659년 세운 비석이다. 김육은 조선 인조, 효종 때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白厚), 호는 잠곡(潛谷),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상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이 기묘사화에 연루된 관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벼슬길에 들어섰다. 1638년 병조판서, 의정부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대동법과 균역법 시행을 건의 상소하였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농사를 지어 부국이 되는 길을 모색하였다. 1643년과 1646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 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시행하였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위민제도를 다수 시행하고, 특히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다. 김육의 저서로는 『유원총보(類苑叢寶)』 등이 있다.

김육이 사망한 뒤 대동법 시행을 주도한 김육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가 김육 불망비이다. 김육 불망비는 2002년 12월 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김육은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농민들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특히 김육은 호남 지역 대동법 시행을 왕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였고 대동법 확대 시행을 유언으로까지 당부하였다. 김육이 죽은 다음 해인 1659년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보호해 준 인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석비를 세웠다. 이러한 김육 불망비는 전국적으로 건립되었다.

[위치]

김육 불망비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함열리 477] 조해영 가옥의 별채 동쪽에 있다.

[형태]

김육 불망비는 4면 비의 2면에 비제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로 이루어졌으며, 기단은 화강암이고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이다. 높이는 163㎝, 너비는 82㎝, 깊이는 27㎝이다.

[금석문]

김육 불망비의 비제(碑題)는 ‘영의정김공육 경요보민인덕 불망비(領議政金公堉輕徭保民仁德不忘碑)’로, ‘영의정 김육공이 요역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보호한 인덕을 잊지 않는 비’라는 뜻이며, 옆에 ‘산부대상공 해불심고금(山不大相公海不深古今)’이라 적었으니, ‘산은 상국(相國) 김공보다 크지 않고, 바다도 예나 지금이나 [김공보다] 깊지 않다.’라는 뜻이다. 아산 동헌의 김육 불망비는 ‘상국김공육영세불망비(相國金公堉永世不忘碑)’[1660]라고 새겨져 있으며, 평택 소사의 비는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1659]라고 적혀 있어 지역마다 특색이 드러난다.

[현황]

김육 불망비는 철제 울타리를 두르고,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육 불망비는 대동법 시행 공적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세워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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