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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18
한자 丹洞祠
영어공식명칭 Dandongsa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49년 3월연표보기 - 단동사 건립
현 소재지 단동사 -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지도보기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익산 경주최씨 문중
관리자 익산 경주최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에 있는 최치원의 사당.

[개설]

단동사(丹洞祠)는 1949년 최치원(崔致遠)[857~?]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6두품 출신으로 12세 때인 869년(경순왕 9) 당나라에 유학하여 6년 만인 874년 빈공과에 급제하고 지방 관직에 제수되었다.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의 벼슬에 올라 당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상품으로 받기도 하였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일을 맡았다.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나라에서 17년간 머물면서 많은 학자들과 문인을 사귀었다. 29세에 신라에 돌아와 태인, 함양,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으며, 농민 반란과 진골 귀족의 부패 등으로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진성왕에게 시무 10조를 지어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각지를 유랑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고려 현종 때에 내사령(內史令)의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문창후의 작위가 내려지고, 우리나라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그리고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지에서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위치]

단동사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에 있다.

[변천]

단동사는 1949년 3월 익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경주최씨들이 시조 최치원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에 지방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형태]

단동사는 우진각 지붕으로 된 정면 4칸, 측면 3칸의 강당인 ‘영모재(永慕齋)’와 맞배지붕으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인 ‘단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과 사당은 각각 담으로 구분하고 문을 통해 연결하였는데, 강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추원문(追遠門)’이며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여재문(如在門)’이다.

[현황]

단동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제사를 행하고 있다. 외삼문 앞에 최치원 신도비(崔致遠神道碑)와 최첨종유공비(崔僉宗有功碑)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단동사는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최치원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할 수 있는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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