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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와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60
한자 眠窩集
영어공식명칭 Myeonwajip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면와집』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소동도
편자 소후산
간행자 소진호|소진석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31.2×20.5㎝
어미 내향삼엽 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권수제 면와집
판심제 면와집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조선후기 문신 소동도가 남긴 문집.

[개설]

『면와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관료인 소동도(蘇東道)[1592~1671]의 문집이다. 소동도의 후손들이 1935년에 간행하였다. 저자인 소동도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고향인 익산 지역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으며, 특히 지방관으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면와집』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저자]

소동도는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 본관이 진주(晋州)이며, 익산 출신이다. 첨절제사 소세공(蘇世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소건(蘇建)이고, 아버지는 찰방 소만선(蘇萬善)이다. 1617년(광해군 9)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1635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정과 학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으며, 1647년에는 평안도 은산부사, 1649년 정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청북어사로서 민정과 수령의 치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0년(효종 1) 11월에는 이조판서 이시방(李時昉), 호조판서 원두표(元斗杓), 병조판서 이후원(李厚源) 등에 의해 의주목사로 추천되었으나 1651년 4월 병이 심해져 교체되었다. 1652년 담양부사를 거쳐 1653년에 제주목사가 되어 민정을 잘 살피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이어 1656년에 대구부사와 능주목사, 1658년에 광주목사, 1659년에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익산으로 낙향하여 몸조리하면서 1667년에는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제사지내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을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에 건립하였다. 1659년 김제군수로 부임하여 3,880여 명의 백성을 구호하였다. 1671년 1월 병으로 타계하였다.

익산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출신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몸소 실천한 소동도는 1719년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면와집(眠窩集)』 인쇄본 5권 2책이 전한다.

[편찬/간행 경위]

소동도의 글은 아들 소후산(蘇后山)에 의해 수집되었으나,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다가 1935년에 후손 소진호(蘇鎭浩)와 소진석(蘇鎭奭)이 소학규(蘇學奎)의 서문을 받아서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5권 2책의 목활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의 크기는 21.1×15.4㎝이며, 10행 20자이다. 주는 쌍행(雙行)이며, 어미는 내향삼엽 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책 크기는 31.2×20.5㎝이다.

[구성/내용]

권1과 권2는 시이며, 권3은 문, 권4와 권5는 부록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1935년 소학규가 지은 서문이 붙어 있는데, 사평공(司平公)이 보관하던 소동도의 글을 후손 소진호(蘇鎭浩)와 소진석(蘇鎭奭)이 간행하면서 자신이 교감과 편집을 맡았음을 밝히고 있다.

권1은 오언고시 스무 수, 오언사율 쉰세 수, 육언절구 한 수, 칠언절구 백 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2는 칠언사율 쉰여섯 수, 칠언고시 한 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3은 소(疎) 한 편, 계(啓) 열 편. 전(箋) 일곱 편, 행장(行狀) 한 편, 묘표(墓表) 한 편, 서(書) 두 편, 잡저(雜著)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는 1659년 병으로 황해도관찰사를 사직하는 글이다. 계는 지평 때에 병으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던 사유를 아뢰거나, 지방관으로서 재해와 기근에서 백성을 구제하고 군병을 포상하고자 조정에 올린 글들이다. 전은 인조의 죽음, 효종 즉위, 정초와 동지, 대전(大殿)과 임금 생일, 왕세자 책봉 시에 하례를 드리는 글이다. 행장은 종증조로서 대사간을 지낸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1476~1528]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 서는 종형인 수재(瘦齋) 소동명(蘇東鳴)[1590~1673], 종질인 월주(月洲) 소두산(蘇斗山)[1627~1693]에게 보낸 편지이다. 잡저는 「유서(遺書)」, 「사직단기우제문(社稷壇祈雨祭文)」, 「숭화산기우제문(崇化山祈雨祭文)」, 「풍헌청약문(風憲廳約文)」, 「의시군서(疑是君序)」 등의 글이다. 「유서」는 저자가 부모의 제사를 위한 위토[제사 비용을 마련하고자 경작하는 논밭]를 마련한 뒤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풍헌청약문」은 정주목사 때 풍속 교화를 위해 풍헌청에서 마련한 조약이며, 「의시군서」는 1655년(현종 6)에 자신의 글에 직접 붙인 서문이다.

권4는 효종이 표리(表裏)[임금이 신하에게 내힌 옷의 겉감과 안감] 한 벌을 내린 유지(諭旨), 소동도가 죽자 현종이 보낸 치제문(致祭文), 익산군수 송시도(宋時燾)가 보낸 제문(祭文),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보낸 만사(輓詞) 쉰한 편,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아들 소후산(蘇后山)이 지은 묘표(墓表)와 가장(家狀)이 수록되어 있다. 권5는 소동도의 연보이다. 권말에 소진호가 지은 발문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면와집』을 통해 17세기에서 활동한 문신 소동도의 중앙과 지방에서의 교유 관계와 소동도의 뛰어난 문장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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