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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조행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71
한자 乙亥漕行錄
영어공식명칭 Eulhaejohaengnok
이칭/별칭 『조행일록(漕行日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을해조행록』 저술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조운 일기
저자 조희백
권책 1책
규격 22.5×23.5㎝
권수제 을해조행록

[정의]

개항기 전라도 함열현의 수령 조희백이 쓴 조운 관련 기록.

[개설]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은 1875년(고종 12)에 조희백(趙熙百)[1825~1900]이 지은 조운 일기(漕運日記)이다. 『을해조행록』에 따르면 조희백은 1874년 말 함열현감 겸 성당창 조세영운관(咸悅縣監兼聖堂倉漕稅領運官)으로 제수되었다. 이에 조창(漕倉)성당창에 가서 세곡미를 싣고 웅포를 출발하여 광흥창에 도착해 세곡을 납부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의 점검을 받고 함열로 돌아왔다.

『을해조행록』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조희백은 자는 순기(舜起), 호는 수산(睡山)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증조부 조만원(趙萬元)은 헌종 때의 세도가 조만영(趙萬永)의 동생이며, 부친 조규년(趙奎年)은 동부승지를 지냈다. 조희백은 1855년(철종 6)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그때의 거주지는 수원이다. 이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나이 쉰 살이 되던 1874년 함열현감에 임명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조창이 있는 지역의 수령이 조운의 책임을 지는 방침이 시행되었기에, 함열현감인 조희백이 성당창 조세영운관을 겸하게 되었다. 조희백은 1875년 3월 22일 조운선에 세곡을 싣고 다음 달 4월 18일 광흥창에 도착하여 세곡을 납부하고 다시 함열에 돌아갔다. 『을해조행록』은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

[형태/서지]

1책 23장으로 된 한문 필사본이다. 표제는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 속표지 제목은 ‘조행일록(漕行日錄)’이며 크기는 22.5×23.5㎝이다

[구성/내용]

『을해조행록』은 총 다섯 부분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1874년 12월 17일부터 1876년 3월 15일까지의 기록이다. 함열현감 겸 성당창조세영운관에 부임하여 전라도의 8읍, 즉 남원, 진산, 익산, 금산, 고산, 운봉, 용담, 함열에서 세곡미 1만 6000석 등을 모으고 이를 배 12척에 실었으며, 떠나기 전에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순풍제(順風祭)를 올리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둘째는 1876년 3월 15일부터 3월 26일까지 금강을 항해한 기록이다. 세곡 운반에 종사하는 인원, 세곡의 양, 세곡 운송에 사용되는 배에 대한 기록들과 더불어 3월 23일 웅포를 출발하고 선소에서 용왕제를 지낸 기록 등이 실려 있다. 또한, 3월 15일 무렵까지 1만 6000여 석을 새로 포장하여 배에 싣고 떠나야 하는데, 곡식이 잘 걷히지 않던 수납상의 어려움, 성당창에서 광흥창까지 경유하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나 그때그때 있었던 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셋째는 3월 27일부터 4월 7일까지 서해 바다를 거슬러 올라간 기록으로서, 개화도, 서천 앞바다, 고대도, 안흥량, 영흥도, 화량진, 팔산도, 영종진을 거쳐 세어리[세어도], 황산, 초지진, 손돌목, 연미정에 이르는 과정이다. 특히 안흥량을 지나 민어리 부근에서 안개가 짙게 끼어 나침반을 이용하여 동북쪽으로 운항한 것과 영종진에 이르러서 전체적으로 선박을 전체적으로 점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넷째는 4월 8일부터 4월 17일까지 한강을 항해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심이 얕고 모래 여울이 많은 한강이 서해보다 항해하기가 더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은 4월 18일부터 4월 19일까지로, 광흥창에 도착하고 이튿날 대궐에 들어가서 인사한 뒤 광흥창에서 호조판서에게 점검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부록으로는 조운선이 경유한 섬과 포구가 기록된 ‘조운노정기’가 있다.

또한, 『을해조행록』 중에는 조희백이 쓴 한시와 이 일에 동행한 이들이 쓴 한시도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을해조행록』은 지방에서 세곡과 운임선을 마련한 과정과 조운선이 경유한 섬과 포구, 운송의 실태 등을 상세히 알려 주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조운 일기 속에 한시를 포함하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보기 드문 해양 기행 문학으로서 문학사적 가치도 높다. 한편, 조운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는 1863년 함열현감 임교진(林喬鎭)이 『을해조행록』보다 12년 앞서 작성한 『조행일록』도 있는데, 19세기 중반의 조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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