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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75
한자 春庵遺稿
영어공식명칭 Chunamyug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원광대학교 도서관 -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신용동 344-2]지도보기
성격 문집
저자 소응천
권책 14권 7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9.6×21.4㎝
권수제 춘암유고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조선 후기 학자 소응천의 문집.

[개설]

『춘암유고(春庵遺稿)』는 조선 후기 영조(英祖)[1694~1776] 때의 학자인 소응천(蘇凝天)[1704~1760]의 문집이다. 소응천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출신으로,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인물이다. 윤증과 윤동수, 윤동원으로 이어지는 소론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산중에서 처사(處士)[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골에 묻혀 살던 선비]로 지내면서 시와 문장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호남 지역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영남에서도 소응천을 존중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보여 준 처사의 기풍을 다시 볼 수 있겠다고 칭송하였다.

『춘암유고』에 수록된 소응천의 글은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응천이 은거하였던 지리산, 덕유산, 익산의 화산[지금의 미륵산]에 관련된 장편 시가 많으며, 서간이나 잡저(雜著) 등을 통하여서도 소응천의 높은 학문 경지를 엿볼 수 있다. 7책의 필사본인 『춘암유고』는 현재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응천은 자는 일혼(一渾), 호는 춘암(春庵),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대사간을 지낸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의 후손으로서, 1704년에 소태겸(蘇泰謙)과 칠원윤씨(漆原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말을 배우자 곧바로 문자를 알았다. 네 살부터 시를 지었고,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의 대의를 깨달아 행동이 단정하고 성현의 행동을 본떴다. 여덟 살에 『중용(中庸)』에 관한 논(論) 두 편을 지었는데, 명재(明齋) 윤증(尹拯)에게서 칭찬을 받았다. 아홉 살에는 『서경』의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읽고 그 원리를 깨달았다.

이후 부모가 세상을 뜨자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있던 누나의 집에 의지하였는데, 경서를 연구하고 문장에 힘쓰는 한편, 역사, 병법, 천문, 지리, 불교, 도교 등에도 두루 통하였다. 그러다가 올바른 길을 찾고자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와 일암(一庵) 윤동원(尹東源)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당화(黨禍)로 말미암아 세상이 날로 그릇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두류산에 들어가 띠풀로 집을 만들어 거주하였다. 온종일 서적을 가까이 하고 깊이 사색하였으며, 때로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시를 짓고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사방의 학자들이 찾아와 “남명 조식 선생의 기풍이 200년 뒤에 다시 이어졌다.”라고 칭송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당시 지방 세력가들이 소응천을 꺼리어 무고함으로써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소응천은 본의와는 달리 명성이 높아지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자 이름난 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살다가 거의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1860년 11월 6일 익산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편찬/간행 경위]

소응천의 숙부나 조카들이 문집을 간행하고자 글을 모았고, 1796년 홍양호(洪良浩)에게 찾아가서 서문을 받았으나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문집을 간행하려고 미처 수록되지 못한 소응천의 글을 모아 속고로 만들었으나, 결국은 간행되지 못하고 현재 필사본 형태로 남아 있다.

[형태/서지]

14권 7책의 필사본이다. 판면을 표시하는 네 귀통이의 선인 사주(四周),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구분하는 계선(界線), 판심 중앙에 아래위를 물고기의 꼬리 모양으로 장식한 어미(魚尾)가 없다 .10행 20자이며, 책의 크기는 29.6×21.4㎝이다

[구성/내용]

서문은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소응천이 호남의 뛰어난 인물이며 시문이 찬란하고 성정이 바르고 호탕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권1부터 권5까지는 시로서 시의 형식이나 단편, 장편을 구분하지 않고 수록하고 있다. 권6부터 권13은 문(文)인데, 내용별로 각 권은 구분되어 있지만, 몇 권인지 권수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권1은 부(賦)와 시(詩)이다. 부는 마음을 갈고닦는 것을 노래한 「여심부(礪心賦)」,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본떠서 지은 「속적벽부(續赤壁賦)」이다. 「속적벽부」는 호탕하고 거침이 없어서 당시 널리 회자되었던 작품이다. 시는 소응천이 1709년 여섯 살 때 지은 시를 비롯하여 백마흔세 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2는 용정(龍井)에서 집에서 온 편지를 보고서 지은 시부터 1732년(영조 8) 섣달 그믐날 밤에 지은 차운시(次韻詩)[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시]까지 도합 백스물네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서 권3에 백아흔네 수, 권4에 여든세 수, 권5에 쉰여덟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권5는 연구로 지은 시가 많다.

권6은 서간이다.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에게 보낸 편지부터 조카 소수유(蘇洙儒)에게 보낸 편지 등 도합 스물다섯 편의 서간이 수록되어 있다. 학문과 시사에 관한 일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권7, 권8, 권9는 잡저이다. 권7은 「독서차의(讀書箚疑)」로서 성리학과 경학을 공부할 때 의심스러운 부분을 기록하여 둔 것이고, 권8은 「예기차의(禮記箚疑)」로서 예기를 공부하였을 때 의심난 부분을 기록한 것이다. 권9는 『농사직설(農事直說)』 발문에 대한 글부터 이성여(李成汝)가 두류산을 유람했을 때 지은 시의 서문에 대한 글까지 잡저 일곱 편, 논(論) 세 편, 상량문 세 편, 잠(箴) 한 편, 명(銘) 세 편, 송(頌) 한 편, 책(策)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0은 서(序)와 기(記)이다. 서는 「반곡고공문집서(盤谷高公文集序)」부터 1738년 오늘날의 미륵산 사자암에서 주고받은 시문의 서문까지 열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기는 「계일당기(繫日堂記)」부터 「독락와기(獨樂窩記)」까지 열아홉 편의 기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1은 제문 스물네 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12는 묘지, 묘갈명, 행장, 전(傳), 녹(錄)이 수록되어 있다.

권13은 『춘암속고(春庵續稿)』로서 시 백열다섯 수가 수록되어 있다. 홍양호의 서문이 쓰인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여겨진다. 권14는 부록이다. 1761년 2월 조카 소수유가 지은 소응천의 유사(遺事), 윤광안(尹光顏)이 지은 행장, 홍양호가 지은 묘갈명, 문인 고명겸(高鳴謙)이 지은 묘지(墓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춘암유고』는 권6부터 권13까지 내용별로 각 권이 구분되어 있지만, 몇 권인지 권수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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