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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시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89
한자 彌山詩稿
영어공식명칭 Misansig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미산시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58년연표보기 - 『미산시고』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간행처 첨소재 - 전라북도 익산군
성격 시집
저자 이희선
편자 이창로
간행자 이창로
권책 1책 77장
행자 12행 24자
규격 28.3×18.0㎝
어미 내향 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권수제 미산시고
판심제 미산시고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근대기 시인 이희선의 시집.

[개설]

이희선(李羲善)[1874~1945]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서 태어난 한학자이자 시인으로서, 개항기인 1891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부사과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국이 좋지 못하자 고향에 돌아와 직접 경작하면서 경전과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시 짓기를 좋아하여 친구들과 함께 시 모임인 사자암시사(獅子山詩社)를 조직하여 미륵산과 금마 일대를 찾아다니니며 많은 시를 남겼다. 이희선의 시는 아들 이창로(李昶魯)에 의해 수집·정리되어 1957년 익산의 첨모재에서 1책 77장의 석판본 『미산시고(彌山詩稿)』로 간행되었다. 『미산시고』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이희선은 자는 양호(養湖), 호는 소초(小樵) 또는 미산(彌山),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할아버지 이종혁(李鍾赫)은 병조참판, 아버지 이봉구(李鳳求)는 충무위 부사용을 지냈다. 어머니는 익성김씨(益城金氏) 김우권(金宇權)의 딸이다.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산동(山洞) 옛집에서 태어났다. 열심히 배움에 임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을 보였다. 자라면서 입신양명의 뜻을 품고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여 1891년 합격하였다. 벼슬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이르렀으나, 시국이 좋지 못하자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손수 전답을 일구고 경전과 사서 등 서적을 1,000여 권을 섭렵하였다.

이희선은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손님과 벗들을 대할 때는 아낌없이 베풀었다. 세상일에는 무관심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길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으며, 굶주린 자들을 널리 보살펴 덕망이 자자하였다. 1913년에는 어머니가, 1917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상례대로 상을 치르고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치를 때에는 오두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1934년에는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제감(祭監)에 제수되어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이후 조용히 은거하여 주변의 절경을 찾아 시를 읊고 가난하되 마음 편한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1945년 2월 24일 눈을 감았다.

[편찬/간행 경위]

이희선은 봄가을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명승지를 유람하고 회포를 시로 곧잘 읊조렸으나, 지은 시를 폐기하고 남겨 두지 않았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아들 이창로(李昶魯)가 몰래 기록하여 세 권의 시책을 만들었다. 이후 이희선이 사망한 지 십 년이 지나자 시문을 다시 정리하고, 1957년과 1958년 강호영(姜浩永)과 김형재(金亨在)의 서문을 받아 1958년 익산의 첨소재(瞻掃齋)에서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미산시고』는 1책 77장의 석판본으로 되어 있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半廓)은 21.3×15.4㎝, 12행 24자이다. 주는 쌍행이며, 어미는 내향 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책의 크기는 28.3×18.0㎝이다.

[구성/내용]

『미산시고』는 서문과 시,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이희선의 행적과 문장이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는 아들 이창로의 청탁으로 1957년과 1958년 강호영과 김형재가 각각 지었다.

시는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로 되어 있다. 오언절구가 두 수. 오언율시가 여덟 수인데, 칠언절구는 친구와의 석별을 읊은 시부터 방규석(方奎錫)의 시에서 운자를 따서 쓴 시까지 마흔다섯 수이다. 그중에서 방규석을 그리워하는 시가 여섯 수나 된다. 이희선의 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칠언율시이다. 내산서실(內山書室)을 읊조린 시부터 방규석의 운자를 딴 시 열 수까지 삼백서른여덟 수나 된다. 금마와 미륵산, 사자암 등에 관하여 읊은 시도 스물두 수나 된다. 이희선의 호인 ‘미산’은 미륵산을 의미한다. 이희선이 산 중에서도 특히 미륵산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이희선은 미륵산에 오르면서 사자암을 자주 찾았다. 사자암을 노래한 시가 12수나 되며, 벗들과 함께 조직한 사자암시사에서 지은 시도 2수를 남겼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암흑기를 살았던 시인이라면 시대 상황에 대한 견해를 시로 남기는 게 보통이었으나, 이희선『미산시고』는 시문에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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