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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90
한자 北山散稿
영어공식명칭 Buksansang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북산산고』 저술
편찬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북산산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북산산고』 간행
간행 시기/일시 1959년 - 『북산산고』 영인본 간행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59년 - 『북산산고』 필사본을 영인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임규
편자 임규
간행자 임익순
권책 1책
규격 23.5×22.2㎝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규의 문집.

[개설]

『북산산고(北山散稿)』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임규(林圭)[1867~1948]가 남긴 문집이다. 임규는 1895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였으며,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쳤다. 이후 최남선과 함께 귀국하여 국학 관계 서적을 간행하고 많은 민족주의자들과 사귀었다. 1919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최남선을 도와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으며, 일본의 여러 곳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 일로 인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임규는 별도로 글을 모아두지 않았는데, 1941년 친구의 부탁으로 삼백스무 수의 시를 모아 필사본으로 시집을 간행하였다. 향토애와 애국 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이 많다. 1959년에 간행된 영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임규는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 자는 형여(亨如), 호는 우정(偶丁), 본관은 평택이다. 1867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지역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익산군수 정기우(鄭基雨)의 심부름꾼으로 있었는데, 정기우의 아들 정만조(鄭萬朝)와 정병조(鄭丙朝)가 방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사서삼경을 깨쳤을 만큼 비상한 천재였다. 1895년(고종 32)에 일본에 가서 게이오의숙 중학교 특별과를 졸업하고 다시 게이오의숙 전수학교(專修學校) 경제과를 졸업한 이후, 1907년 청년학원(靑年學院)에서 일본어를 지도하였다. 이 무렵 유학생인 최남선(崔南善)이 임규를 권유하여 1908년 4월 같은 배를 타고 귀국하였다. 이후 최남선의 학문적 지원을 받아 신문관과 광문관에서 국학과 관계한 신간 서적을 많이 발간하였다. 문하생 가운데에는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 신익희(申翼熙) 등 나중에 민족지도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1915년 이후에는 보성학교 교사, 보성법률상업학교 강사를 지냈다. 1918년에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여러 지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독립선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기미 독립선언서」도 최남선이 임규의 집에서 3주에 걸쳐 작성하였으며, 임규가 수정 작업에 자주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임규는 1919년 2월 27일 오후 7시 최남선에게서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통고문 세 통과 「독립선언서」를 받았는데, 3월 1일 오후 4시 무렵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를 3월 3일 일본 수상과 의회에 우송하였다. 3월 9일 귀국 도중에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도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19년 8월, 경성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독립이 없는 조국 땅에 나가지 않겠다.”라고 절규하였다고 한다. 1920년 9월 출옥하였으나 계속 감시가 필요한 사람으로 찍혀 엄한 감시를 받았다.

1925년에는 협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7만 자나 되는 어휘를 수집하였다. 말년에는 서울의 성북동 청룡암 미륵당이라는 암자에서 하숙을 하면서 지냈다. 그곳에서 당대의 명사인 한용운(韓龍雲)이나 오세창(吳世昌), 정인보(鄭寅普) 등과 시류(時流)를 논하고 시를 짓고 지냈다. 1947년 고향에 내려와 1948년 3월 7일 일흔두 해의 생애를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임규의 공덕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익산시 덕기동에 묘비가 세워졌다

[편찬/간행 경위]

1941년 초 "말년에 작품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백농(伯農) 최규동(崔圭東)의 요청을 받아들여 임규는 생각나는 대로 글을 모아서 1941년 9월 하순에 집필을 마쳤다. 임규는 1948년 세상을 떴으며, 그 후 10년이 지나 1959년 임규의 손자인 임익순(林益淳)이 필사본 그대로 영인(影印)하여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인본은 1책 52장이고 크기는 23.5×22.2㎝이다.

[구성/내용]

『북산산고』는 발간사, 서문,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간사는 1959년 3월 6일 임익순이 지은 것이고, 서문은 1941년 9월 하순에 지은 저자의 글이다. 이어 시 삼백스무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오언절구 81수, 칠언절구 24수, 오언율시 수, 칠언율시 백여든 수, 오언배율 두 수이다. 주로 일상생활에 관련된 시가 많다.

3·1운동 민족 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임규의 시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임규는 「병중술회(病中述懷)」에서 나이 일흔둘에 자랑할 것은 없고 광무·융희년[대한제국 시기를 말한다]이 가장 슬펐다고 하여 나라 잃은 슬픔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행위에는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다. 임규는 1919년 9월 옥중에서 강우규(姜宇奎)[1855~1920] 열사가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저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감동하여 시를 지었고, 이듬해 강우규 열사가 사형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잔악한 오랑캐는 혼백이 살았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고, 의사의 몸은 던져 부서졌으나 오히려 온전하다"고 시를 지어 넋을 기렸다.

「동아일보 창립 20주년 기념」은 예순두 살 때인 1938년에 임규가 지은 것이다. 『동아일보』가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어 한결같이 안개 낀 바다 위 나침반이 되어 주고, 만인의 횃불이 되어 어두운 골목을 비추어 주었다고 칭송하였다. 하지만 1940년대가 되어 친구들도 많이 세상을 뜨고, 일제의 잔악한 식민 지배가 계속되자 절필을 선언한다. 임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기대하는 것은 며칠이 되나, 아득하여 손가락을 꼽곤 한다/ 한 생명 여기에 그치니 천추에 망국한 백성이로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독립의 희망은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나라 잃은 백성임을 탄식하고 붓을 꺾어 버린 것이다.

[의의와 평가]

『북산산고』3.1운동 민족 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임규의 성품과 애국 의식을 엿볼 수 있는 한시를 수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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