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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641
한자 吳應鼎
영어공식명칭 Oh Eungjung
이칭/별칭 문중(文仲),완월당(翫月堂),충렬(忠烈)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8년연표보기 - 오응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오응정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오응정 군기시첨정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오응정 수탄장으로 대동강 방어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오응정 경기방어사 겸 수원부사로 재직하다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오응정 순천부사 재임 중 남원성 방어전에 참전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오응정 사망
출생지 용안 -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순천 - 전라북도 순천시
부임|활동지 남원 - 전라북도 남원시
사당|배향지 삼세오충렬사 -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남원 충렬사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만인로 3]
사당|배향지 금산 충렬사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성격 무신
성별
본관 해주(海州)
대표 관직 경기방어사|수탄장|순천부사

[정의]

조선 후기 익산 출신의 무신.

[가계]

오응정(吳應鼎)[1548~1597]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월당(翫月堂)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오하몽(吳下蒙)이다. 아들은 오욱(吳稶), 오직(吳稷), 오동량(吳東亮)이다. 손자는 오방언(吳邦彦)이다.

[활동 사항]

오응정은 1548년(명종 3) 지금의 익산시 용안면에서 태어났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한 뒤 비변사낭관을 거쳐, 사헌부감찰·형조정랑을 지내고 1579년에 군기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83년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탄핵하는 상소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 세력의 미움을 사 전라도 흥덕현감으로 좌천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왔다.

1589년 오응정은 도총부도사에 임명되었고, 해남현감과 벽단첨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 대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방어하였다. 상황이 위급해져서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신할 때 어영대장이 되어 왕실을 호위하였다. 왜군과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시기에 강화부사로 부임하였고, 얼마 후 만포진첨사가 되어 압록강 변을 경비하였다. 1596년에는 경기방어사 겸 수원부사로 재직하였는데 소인배의 모함으로 파직당하여 다시 낙향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오응정은 훈련도감의 중군이 되었고, 이어 순천부사로 임명되어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등과 함께 남원성 수성을 준비하였다. 당시 5만 6000명에 이르는 왜군의 공격으로 남원성이 함락되자 오응정은 맏아들 오욱, 셋째 아들 오동량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오응정의 둘째 아들인 오직은 광해군 때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손자인 오직의 아들 오방언 또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싸우다가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샛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후대에 오응정과 세 아들, 손자를 기리기 위하여 “삼세오충(三世五忠)”이라 일컬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를 충렬이라 하였고, 가선대부 한성부좌윤에 증직되었으며, 다시 1759년(영조 35)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가자되었다. 오응정을 기리기 위하여 남원 충렬사, 금산 충렬사, 용안 삼세오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7.13 내용변경 [이칭/별칭] 완원당(翫元堂) → 완월당(翫月堂) [상세정보] 출생시기/일시 1559 → 1548 [가계] 오응정(吳應鼎)[1559~1597]의 → 오응정(吳應鼎)[1548~1597]의 [활동 사항] 오응정은 1559년(명종 14) 지금의 → 오응정은 1548년(명종 3)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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