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75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Dynasty
이칭/별칭 조선 시대,조선 왕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성미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 구역]

2019년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는 조선 시대의 4개 군현을 통합하여 1914년 성립되었다. 조선은 1413년(태종 13) 행정구역을 8도로 정비하였고 전라도는 1부[전주] 4목 7도호부 12군 31현을 두었다. 익산군은 12개 군 중의 하나로 고려 시대 익주를 익산군으로 개편하여 칭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이웃 고을인 여산도호부는 여산군(礪山郡)으로, 함열현은 함열군(咸悅郡)으로, 용안현은 용안군(龍安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에 1899년에 ‘이리’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옥야현이 더해졌고 1947년 이리읍이 익산군에서 분리되었다가 1995년 익산시로 통합되었다.

[정치·사회]

1. 관원과 토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시대 익산군과 여산군에는 군수, 훈도 각 1명, 용안현함열현에는 현감과 훈도 각 1명의 관원을 두었다. 익산군의 토성(土姓)은 7개이며, 김(金)·한(韓)·송(宋)·이(李)·황(黃)·임(林)·구(仇)이다. 흑석(黑石)의 성이 2개이며, 이(李)·구(仇)이다. 속성(續姓)이 1개이며, 김(金)이다. 여산군은 토성이 4개이며, 이(李)·송(宋)·오(吳)·황(黃)이다. 속성이 5개이며, 김(金)·배(裵)·임(林)·문(文)·염(廉) 이다. 함열현은 토성이 5개이며, 남궁(南宮)·조(趙)·장(張)·염(廉)·박(朴)이다. 속성이 2개이며, 김(金)·조(趙)·장(張)·석(石)이다. 용안현은 토성이 4개이며, 장(張)·조(趙)·박(朴)·남궁(南宮)이다. 내접망성(來接亡姓)이 1개이며, 최(崔)이다. 속성이 5개이며, 임(林)·김(金)·박(朴)·이(李)·유(兪)이다.

2.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익산 지역에는 남해에서 한양으로 연락되는 함열의 소방봉봉수대(所方峰烽燧臺)와 용안의 광두원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어 군사상 중시되었다. 의병 활동 역시 활발하였다. 특히 정유재란 때 익산 사람인 오응정(吳應鼎)·오욱(吳彧)·오동량(吳東亮) 부자는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의병장 이보(李寶)는 진산전투(珍山戰鬪)에서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서는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여 많은 의병을 모아 청주·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3. 대동법과 김육불망비

대동법은 부산품(不産品), 절산품(切産品)에도 부과되는 공납을 모두 전결세화한 조선 최고의 조세개혁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래 백여 년에 걸쳐 시행된 대동법은 1658년(효종 9) 전라도 연해 지역 27개 군현에 시행되었으며 이어 1662년(현종 3) 산군(山郡)지역에도 실시되었다. 김육은 대동법에 평생을 바친 관료학자로 대동법이 시행될 당시 백성들의 적극적인 환호가 있었다. 김육의 대동법 시행에 대하여 익산 지역 농민들이 김육의 선정비 2개를 세웠다는 점에서 익산 지역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7번지[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에 있는 ‘김육 불망비(金堉不忘碑)’는 조선 1659년(효종10),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에 건립되었다.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익산시 용안면 교동리 299번지, 익산 용안동헌 뜰에도 김육의 선정비가 있다. 용안 지역의 김육 선정비는 세곡의 보관창고인 덕성창(德城倉)성당창(聖堂倉)이 있던 곳으로 김육의 대동법 실시는 수취와 관련하여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3. 교육과 함라노소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둔 국립교육 기관이다. 부·대도호부·목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조선왕조는 여산리여산향교, 금마면 동고도리익산향교, 함라면 함열리함열향교, 용안면 교동리용안향교 등을 설치하여 익산 지역의 교육을 담당 하였다. 사립교육기관으로는 금마면 용순리화산서원기양리화암서원 등이 선현배향과 강학을 담당하였다.

노소는 현재의 경로당, 노인정과 같이 노인 등이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조선 시대의 노소는 단순히 공간적 기능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통솔하고 이끌어 가는 정치·사회적 기능도 담당하였다. 함라면 함열리 수동마을함라노소는 1687년(숙종 13) 7월에 건립되어 그 유서가 매우 깊으며 선생안의 영위 500여 명을 기리기 위하여 춘향제와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4. 수탈과 농민봉기

1862년(철종 13) 2월 18일 진주민란에 이어 3월 27일 익산에서도 농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다. 익산민란은 도결의 폐단과 봉건정부의 수탈, 그리고 향촌 내 양반의 횡포 등 19세기 전반적인 봉건정부의 무능과 수탈에 맞선 항쟁이다. 익산 지역 농민들은 임치수·소성홍의 주도 아래 여러 번 도회(都會)를 열면서 감영과 정부에 제반 폐막을 해결해 달라는 등소를 올렸으나 조치가 없자 직접 항의하기 위하여 관아로 몰려갔다. 군수 박희순의 답변이 없자 농민들은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빼앗고 군수의 옷을 찢고 욕을 퍼부은 뒤 묶어서 고을 경계 밖에다 내다 버렸다. 또 함열현에 난입하여 그 병부도 탈취하였다.

농민들의 봉기는 도결의 시정을 요구한 적극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 민란과 달리 군수를 구타하고 모욕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익산민란의 격렬함에 주목하였다. 4월 2일 부호군 이정현을 익산 안핵사로 임명하고 안핵사의 보고에 따라 민란 가담자 임치수·이의식·소성홍·천영기 외 4명, 봉기 기미를 알고도 이를 묵과한 이방 임종호, 호장 임덕호, 좌수 최학손 등 10명을 효수하였다. 또한 민란의 책임을 물어 전라감사 김시연, 군수 박희순을 귀양 보내 경계하였다. 19세기 봉건정부의 침탈에 따른 익산 지역 농민들의 적극적인 항거라는 측면에서 익산민란의 의의가 있다.

[경제]

1. 인구와 토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익산군의 호수는 319호이며 인구는 1,623명이다. 여산군은 호수가 312호, 인구는 1,419명이며, 함열현은 호수가 288호, 인구가 1,384명. 용안현은 호수가 190호, 인구는 662명으로 총 5,088명이다. 군정은 익산군의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1명, 진군(鎭軍)이 44명, 선군(船軍)이 295명이며 여산군은 시위군 17명, 진군 43명, 선군 222명이다. 함열현은 시위군 11명, 진군 25명, 선군 326명이다. 용안현은 시위군이 2명, 진군 13명, 선군 125명, 덕성창(德成倉)의 수호군(守護軍)은 3명이다.

토지 전결수는 익산군은 간전(墾田)이 3,726결, 여산현은 4,362결, 함열현은 3,298결, 용안현은 1,991결로 총 1만 3377결이다. 논은 밭에 비하여 평균 40%이다.

2. 조창 설치

조선은 전국 각 지방에서 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조창을 설치·운영하였다. 금강의 지류인 익산 함열 지역에는 1428년(세종 10)에 덕성창, 17세기에 성당창이 설치되었다. 1390년 용안에 득성창(得城倉)이 설치되었는데 득성창이 그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자 함열의 피포로 옮겨 덕성창으로 개명하였고 15세기 전반 함열의 덕성창은 전라도 26개 고을의 전세가 수납되는 국영창고 기능을 담당하였다. 덕성창은 고창 일대를 제외한 현 전라북도 지역의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금산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당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지대하였다. 덕성창은 1487년까지 59년간 지속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성당창이 설치되었다. 『만기요람』에는 성당창에 12척의 조운선이 소속되어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3. 장시와 토산품

상업인구가 증가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큰 장시들이 전국에 발달하였고 정기장이었던 시장들은 점차 상설시장화 되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익산 지역의 6개의 장시를 소개하고 있다. 익산 읍내장[2일, 7일], 회화장[5일, 10일], 용안 난포장[2일, 7일], 함열 읍내장[3일, 8일], 황등장[5일, 10일], 여산 읍내장[1일, 6일] 등으로 이들 시장 가운데 용안 난포장은 조창이 있던 용안면 웅포에 개설된 시장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익산군의 토산품은 대나무, 붕어, 생강 등이고, 여산군은 게, 용안현은 게, 뱅어, 붕어, 웅어, 숭어, 민어 등이며, 함열현용안현과 같은데 순채 모시가 더하여져 있다. 오희문의 임진왜란 피난일기인 『쇄미록』[1594~1595년]에는 함열현감으로 있는 사위로부터 위와 같은 토산품을 선물 받는 기록이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장시에서도 농산물과 더불어 주 거래 품목이었을 것이다.

[문학·사상]

1. 허균의 『성소부부고』 집필

익산은 1611년(광해군 3) 허균의 유배지로서, 함라면 함열에서 홍길동전에 버금가는 작품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집필하였다. 『성소부부고』의 「도문대작」은 함열과 관련한 글들로 허균의 문학적 상상력과 기발한 착상을 엿볼 수 있다. 허균이 함열로 유배를 자원한 까닭은 함열이 1608년경 허균이 은거하였던 부안과 인접한 곳이었고 함열현감이었던 한회일(韓會一)과의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허균의 거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감과의 관계에서 볼 때 관아지 부근 객사나 인근 처소에서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11년 1월 5일에 함열에 도착한 허균은 11월 12일 유배지에서 풀린 후 24일 또 다시 부안으로 내려가는데, 함열에서의 유배생활은 전라도에 애착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성리학자 간재 전우 유적지

익산은 조선 말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1841~1922]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율곡과 우암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한 전우는 오진영·최병심·이병은·송기면·권순명·유영선·김병준·김택술 등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제자와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을 참수할 것을 상소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부안·군산 지역 근처 섬에 은거하며 강학과 학문에 힘썼다. 전우는 제자를 양성하여 도학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익산 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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