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03
한자 三福之人嘉藍李秉岐
영어공식명칭 Garam Lee-Byungki with Three Blessings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1년 3월 5일 - 이병기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 삼복지인 가람 이병기 문장사에서 『가람시조집』 발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1월 26일 - 이병기 사망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출신의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에 관한 이야기.

[개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는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일제 강점기에 시조 부흥 운동에 앞장섰고 시조뿐만 아니라 국문학·서지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술과 제자, 난초를 사랑한 삼복지인(三福之人)의 훈훈한 인간미 또한 이병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전라북도 소년 운동의 창시자, 가람]

이병기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변호사 이채(李倸)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병기는 할아버지 이동우(李東愚)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며 평범한 학동으로 살다가 1906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혼례를 올렸다. 그즈음에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우연히 접한 이병기는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1910년 스무 살에 졸업하였다. 이병기는 할아버지에게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를 간청하였고, 3월에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이미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일본에 외교권과 경찰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앞날이 암울하던 때라서, 이병기의 서울행은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관립한성사범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에 입학한 이병기는 주시경(周時經)[1876~1914]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 중등과와 고등과를 이수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하였다. 1913년 3월 학교를 졸업한 이병기는 전주제이보통학교(全州第二普通學校) 훈도로 재직하던 중, 1915년 전주제일보통학교의 윤상언(尹相彦)과 소년 단체 미성회(美成會)를 조직하였다. 전라북도의 소년 운동이 이병기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미성회는 나라 잃은 식민지 소년들에게 근면하고 검약하는 생활 습관을 내면화시키고자 만든 단체였다. 그 후에 이병기여산보통학교(礪山初等學校) 훈도 등을 지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1919년 3월 교직을 그만두고 만주를 여행하며 국권 상실의 울분을 다스리며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10월에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일본 경찰은 이병기를 연행하여 독립운동 혐의를 추궁하였고, 그 뒤로 집요한 감시가 떠나지 않았다.

직장이 없던 이병기는 1920년 11월 조선불교회에 나가 영호(映湖) 박한영(朴漢永)[1870~1948]의 『능엄경(楞嚴經)』 강의를 듣고, 12월 조선불교회의 이사를 맡았다. 그 무렵 이병기는 서울에 체류하며 조선불교회, 대종교(大倧敎) 등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한 이병기는 본격적으로 한적(漢籍), 고전 등의 한국학 관련 서적을 수집하느라고 월급을 탕진하였다. 이병기는 매월 급여로 받는 18원 중에서 반 이상을 고서 구입에 투자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훗날 ‘처자들에게 반반한 치마 한 벌, 과일 한 톨 못 사다 주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였던 이병기는 서지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물심양면을 투자하느라 고생하였다.

[한글 운동과 시조 부흥 운동]

이병기는 1921년 11월 25일 권덕규(權悳奎)[1890~1950], 임경재(任暻宰)[1876~1955] 등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글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병기는 간사로서 여러 곳에 다니며 한글 강의를 펼치는 한편, 다음해에는 전주 유지들이 설립한 호영강습원(湖英講習院)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7년 이병기는 2월에 권덕규, 최현배(崔鉉培)[1894~1970], 정열모(鄭烈模)[1895~1968], 신명균(申明均)[1889~1941] 등과 동인지 『한글』을 창간하고 한글의 보급과 이론 정립에 앞장섰다. 1933년 1월 창립된 조선문흥회(朝鮮文興會) 간사 등을 계속 맡으면서 이병기는 한글 운동을 심화하는 한편, 진단학회(震檀學會) 등에 참여하며 국권 회복의 의지를 다졌다. 그 때문에 이병기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병기는 바쁜 와중에도 1939년부터 문예지 『문장』의 선고 위원을 맡아 시조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미 『동아일보』 등에 시조 부문의 심사 위원으로 관계하며 유수한 시조 시인들을 배출한 이병기였으니, 『문장』에서 활동하며 거둔 수확도 여간 만만치 않았다. 그 시절은 일제에 의하여 카프[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가 해체될 정도로 탄압이 극도에 달하던 때였기에 시조 시인을 뽑는 일조차 의미 있는 사업이었다. 더군다나 이병기는 단순히 시조 창작뿐 아니라 시조 이론에도 탁월한 경지를 이루었으니, 이병기의 선고 행위는 광복 후의 시조단을 재건하는 일에도 유용하였다.

[삼복지인]

평소 이병기는 자신이 술 복, 난초 복, 제자 복을 타고났다고 주위에 자랑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운명하는 날까지 반주를 빠뜨리지 않은 이병기는 그야말로 청탁불문(淸濁不問)이요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이병기는 1951년 전주 명륜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 교수를 겸하였다. 1952년 국립전북대학교의 개교식에서 초대 인문대학장으로 취임하였고, 1956년 3월에 그만두고 중앙대학교 교수로 올라갈 때까지 전주 양사재(養士齋)에서 지내는 동안 후배 문인들과 잦은 술자리를 벌이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시인 김해강(金海剛)은 수필 「일배 일배 부일배로」에서 생일을 맞은 이병기가 자신을 비롯하여 신석정(辛夕汀)[1907~1974], 백양촌(白楊村), 신근(辛槿)[1921~2003], 구름재 박병순(朴炳淳)[1917~2008]을 불러 박주를 마셨다고 회고하였다. 또 소설가 박상남은 수필 「전파」에서 이병기가 주회의 회장이 되어 자신을 포함하여 김해강, 황호면, 신석정, 백양촌, 박병순, 최승렬, 김영만 등과 주연을 베풀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이병기는 유별날 정도로 난초를 좋아하였다. 이병기의 일기에 적힌 난의 종류만 하여도 다양하다. 가령 건란, 복주한란, 풍세란, 사란, 오란, 십육라한, 철골소심, 관음소심, 신죽소심, 일경구화, 옥우란, 자한란, 대만한란, 도림란 등이다. 이 중에서 도림란은 춘란의 일종으로, 이병기의 도움으로 이름을 얻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1년 만에 풀려나 집에 돌아온 이병기는 말라 죽은 난을 보고 극히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병기는 40여 년 동안 가꾼 난초 재배법과 함께 매화 재배법도 남길 만큼 매화도 가까이하였다. 이병기가 서울에 사는 동안에 작명한 당호 매화옥(梅花屋)은 매화를 사랑하는 취미에서 우러난 것이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난초 4」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그의 습벽을 알아보면 된다고 한다. 국망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난처럼 살았던 이병기였기에, 난초를 노래한 시조도 예사롭지 않다. 이병기는 난향을 가까이하며 세사로 인한 오예(汚穢)[지저분하고 더러움]를 씻었다. 사람이 제아무리 깨끗이 살려고 하여도 세상의 더러움을 아니 묻힐 수는 없다. 이병기는 날마다, 밤마다 난을 닦고 물을 주며 ‘미진도 가까이 않고’ 살려고 노력하였다. 난과 일체화된 이병기의 청빈한 삶과 고아한 작품 세계는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죽하면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에 발문을 쓴 정지용(鄭芝溶)[1902~?]이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라고 평언하였을까?

이병기의 시조에는 음악성을 찾기 힘들다. 이병기가 애초부터 노래로서의 시조를 지양한 탓이다. 이병기는 무기교를 시조의 격조로 생각하였고, 시조의 근대화를 음악성의 거세에서 찾았다. 유사한 사례는 노래하는 시가에서 음악성을 삭제하여 읽는 시로 변신한 근대시가 있다. 이병기는 시조의 근대성을 읽어서 즐기는 것에 중점을 둔 대신, 최선의 기교를 “작가가 자기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근대의 물결에 휩쓸려 전래의 곡조를 대체할 만한 격조를 시조 작가의 내면에서 찾아낸 것이다.

생전에 이병기의 문전에는 찾는 이들로 붐비었다. 그들 중에서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스승에 대한 존경은 놀랍다. 1954년 박병순은 전북대학교에 국문과가 생기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뒷날 전쟁 통에 가람이 전주에 머물자, 박병순은 본격적으로 이병기에게 시조를 공부하였다. 그 뒤로 박병순은 평생 동안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며 극진히 예우하였는데, 이병기가 중풍으로 여산에 은거할 당시에는 주말마다 거르지 않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별]

이병기는 고향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병기의 필명 ‘용화산인(龍華山人)’은 향리의 뒷산에서 따온 것이다. 이병기는 해방이 된 해에 1945년 8월 17일 고향에서 여산민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0월 말 미군정청(美軍政廳) 학무국 편수관이 되어 상경하기 전까지 이병기는 고향 사람들과 독립으로 인한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기꺼이 지혜를 제공하였다. 또 이병기는 1963년 갑오동학혁명기념탑(甲午東學革命紀念塔) 건립위원장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전까지 동학란(東學亂)으로 홀대받던 역사적 사건을 혁명의 차원으로 승격시켜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김제 출신의 사학자 김상기(金庠基)와 같이 거들어서 후손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줄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병기는 지역 문단의 재건에도 솔선하였다. 1946년 2월에 김창술, 김해강, 정우상, 채만식, 신근 등과 함께 전북문화인연맹을 조직하여 문화인들끼리의 통합을 도왔다. 6·25전쟁 후에는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들끼리 모여 만든 『시와 산문』에 김해강, 신석정, 서정주, 신근 등과 같이 참여하여 전후의 황폐한 시심을 추스렸다. 1954년 8월 이병기는 일군의 작가들과 1953년에 출범한 전주문학회를 대신한 『시원(詩園)』을 발간하고자 모임을 결성하였다. 또 1958년 3월에는 신석정, 신근, 박병순, 유림일, 최승범, 최진성, 고림순 등과 사화집 『새벽』을 출간하여 전라북도 시단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처럼 혁혁한 공로를 남긴 이병기는 1969년 11월 28일 생가에서 사망하였다. 이병기의 장례식은 고향 여산남초등학교에서 전라북도문화인장으로 치러졌다. 이병기의 유택은 집 뒤의 용화산록에 마련되었고, 전주에는 시비가 세워져 이병기의 시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념의 자리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병기가 세상과 소통하던 수우재(守愚齋) 앞뜰에 문학관이 지어져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맞고 있다.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 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끔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 든다

찬 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전주 다가공원에 있는 시비에 새겨진 이병기의 시조 「시름」의 전문이다. 예전에는 전주가 크지 않아서 갈 곳 없는 청춘 남녀들이 잘 찾았던 곳이나, 지금은 도시가 발전하면서 외진 곳이 되어 버려 발길이 많지 않다. 다가공원보다는 이병기가 묵었던 전주향교의 양사재를 오는 이가 더 많아졌다. 한옥마을이 관광지가 되면서 고리타분한 공맹의 가르침을 받들던 곳이 젊은이들의 관람지가 된 덕분이다. 이병기가 양사재에 유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북대학교가 향교 재단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사실, 곧 이름부터 ‘명륜대학’이었던 것과 연관시켜 보면 바로 이해될 터이다.

이병기는 1909년부터 60여 년에 걸쳐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한문으로 썼다가, 1919년 8월부터 한글로 썼다. 이병기의 기록벽은 후인들에게 귀감이 될 뿐 아니라, 문학사의 서술에도 귀중한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특히 이병기처럼 교제의 폭이 넓고 따르는 문인들이 많았던 이의 경우에는 가치가 더 있다. 이병기는 1963년에 일제 강점기부터 수집한 장서를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가람문고’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이병기의 고서들이 제자리를 찾고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병기『가람시조집』[문장사, 1939], 『국문학전사』[백철 공저, 신구문화사, 1957], 『가람문선』[신구문화사, 1966], 『가람시조선』[삼중당, 1975], 『가람일기』[신구문화사, 1976] 등을 저술로 남겼다. 이병기의 시조집들은 한국 시조 문학의 백미에 해당하거니와, 작품마다 한국적인 정서와 율격을 육화하고 있어서 지금도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또 이병기가 백철과 분담하여 저술한 『국문학전사』는 마땅한 교재가 없었던 대학 강단에 널리 보급되어 한국문학 연구자들에게 등불이 되어 주었다. 이로써 이병기는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별이 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