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지만 있는 백제의 호수, 황등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12
한자 -百濟-湖水黄登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조법종

[정의]

호남 명칭의 유래와 익산의 황등호에 얽힌 이야기.

[역사에 나타난 광역공간 명칭의 양상]

우리나라 전통 역사 및 지리 관련 기록에 나타난 광역 공간에 대한 표현은 삼국 시대 거점 중심의 성(城)을 지역의 명칭으로 사용하던 전통을 신라가 삼국 통일 이후 전국을 9주(州) 체제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즉, 신라는 고구려·백제를 통합한 후 685년(신문왕 5)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9주’의 설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지리 구분 인식인 9토(九土)지형설을 차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9개 주의 이름은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로서 여전히 중심 지역의 명칭으로 광역 통치구역을 나타내었다.

이 같은 명칭 표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성종이 고려 전국을 10도 체제로 나누면서 처음 나타났다. 즉, 995년(성종 14) 당나라의 제도를 채용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때의 명칭을 보면 관내도(關內道),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라고 하였다. 이들 명칭 가운데 전주와 주변 지역을 강남도(江南道)로, 광주·나주와 주변 지역을 해양도(海陽道)로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명칭에서 나타난 특징은 종래 거점 지역의 명칭이 아닌 하(河), 강(江), 영(嶺), 산(山) 등을 기본으로 하여 광역 지역 명칭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구분하는 강과 산줄기를 기본으로 하여 전국을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역 구분에서 지리적 요소에 근거하여 나누는 상황은 기존 신라의 9주체제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지만 광역 지역 명칭에 지리적 요소를 부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여기서 하(河)는 한강으로, 강(江)은 금강으로, 산(山)은 지리산으로, 령(嶺)은 대관령으로 파악된다.

이같이 통일신라 시대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광역 지역 명칭을 표현하던 방식을 산과 강 등 지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인식 변화는 고려의 건국의 토대적 인식으로 활용한 풍수지리적 관점이 작용하여 전국을 지리적 관점을 기본으로 파악하겠다는 고려 통치 세력의 관점 변화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현종 때에 5도 양계체제로 바뀌며 광역 명칭에 다시 지역 거점 명칭을 사용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즉, 1018년(현종 9)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全羅道)로 개칭하였다. 이는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딴 이름으로 ‘전라도’라는 지명의 연원이 되어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전라도’라는 이름이 유지되었다. 즉, 현종 때에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며 전국을 5도(道)와 양계(兩界)로 나누었다. 이는 기존 지역 명칭에 기반한 표현이 갖는 장점과 관성이 재부각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도체제 명칭들이 시작되었다. 즉, 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 등의 표현에서 지역 거점 명칭을 중심으로 지리적 표현인 ‘서해도’란 명칭이 혼용된 표현이 나타나 전라도, 경상도 등 전주-나주를 잇는 행정구역, 경주-상주를 잇는 행정구역이라는 광역 공간 인식이 나타났다. 특히, 9주나 10도체제가 중국의 지방 편제 방식을 원용한 것이라면 5도 양계체제는 고려의 독자적인 행정 체계라는 점에서 고려 사회의 독자성과 체제의 안정성을 염두에 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호남 명칭의 유래]

‘호남’이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포함하는, 즉 조선 시대의 전라도 지역이라는 인식하에 사용되고 있다. 호남은 한자어로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으로서 ‘호(湖)’가 기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호’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앞서 고려 시대 지리적 관점에서 활용된 산이나 강으로 대표되는 표현이 아닌 호(湖)라는 표현이 사용된 독특한 표현이다.

종래 ‘호남’이란 표현의 연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가 있다.

호남에서 ‘호’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기준들은 크게 호수와 하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호수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호수로는 김제의 벽골제와 정읍[고부]의 눌제, 익산 황등의 황등제[요교제], 그리고 제천의 의림지 등 네 곳을 기준점으로 설정하는 입장이다.

둘째 강을 기준으로 파악하는 입장으로는 금강[호강]과 한강[이을호, 1964. 2.] 등 두 곳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호수와 강을 기준으로 제시하는 방법에서는 벽골제 한 곳만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호남 3호[벽골제, 눌제, 황등제]를 동시에 제시하는 경우[유형원]와 벽골제와 의림지 등 두 곳을 제시하는 경우[이긍익], 호수[벽골제, 요교호]와 함께 하천인 금강을 동시에 제시하는 경우[이영택, 1986] 등 다양하다.

셋째, 중국 지명 활용설이 있다. 이는 우리 나라 지명 중 중국 지명을 활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 근거한 것으로 중국에 있는 동정호(洞底湖)[뚱영호]를 기준으로 호남성(湖南省)[후난성]과 호북성(湖北省)[후베이성]이라는 지명이 존재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과거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였을 때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호남’은 송나라 때는 역로의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청나라[1616~1911] 때에 지방행정구역인 성(省)의 이름으로 전용되었다는 사실과 중국의 호남성과 우리나라 호남지방의 지형 구성이 크게 다른 점, 그리고 중국에서는 행정구역명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17세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에 이미 지역의 별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지명의 활용설은 현실성이 약하다.

결국, ‘호남’이란 지명은 우리나라에서 전라도 권역의 대표적인 호수에서 유래하였거나 통일신라, 고려 시대 지역 경계 기준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강인 금강이나 한강 등 강을 기준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 호수유래설

실학의 비조로 추앙받는 유형원[1670]은 호남은 3호[벽골제, 황등제, 눌제]의 남쪽이라고 하면서 3호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이긍익[1806]과 최남선[1937]은 벽골제와 의림지를 제시하면서 호남과 호서의 기준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영택[1986]은 호남지방, 호서지방에서의 호(湖)의 기준으로 요교호와 벽골제 그리고 금강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호남과 호서의 기준이 되는 ‘호’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호남’과‘호서’에서 기준이 되는 ‘호’의 통일성 여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두 지명의 퉁장 시점과 여러 상황을 같이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2) 강 유래설

전라도를 호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금강의 다른 명칭인 호강(湖江)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전라 지역은 조선 시대부터 ‘호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불리어 왔다. 이는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불리는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박영한, 국토지리정보원, 2004]라고 하면서, 전라 지역의 영역과 지리적 환경을 고려할 때 금강의 남쪽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호수와 연결된 호남 지역의 3호를 기준으로 제시하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또한, ‘호남’이라는 지명은 행정구역명이 아닌 문화를 논의할 때 불리던 지명이고, 지역명 자체는 금강을 기준으로 한 자연조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박준규, 『한국지역지리학회지』14-2, 1997]. 이는 영동이나 영남, 관북과 관서가 교통로인 고개를 중심으로 지명이 만들어졌고, 호남과 호서는 하천을 기준으로 한 것과 같이 지명 자체는 자연적 기준에 의해서 붙여졌다며, 주로 문화권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호남’이라는 지명을 해석하고 있다.

또한 ‘호남=전라도’라는 지역적 성격을 기준으로 할 때 방향과 지역적 장애를 고려하면 금강을 기준으로 그 남쪽지역이라는 의미가 적절하다고 본다[조성욱, 2008].

한편, 이을호[1964]는 ‘호남’이라는 지명을 역사문화권 개념으로 파악하고, 백제문화권인 호남 지역에서 백제 건국 설화나 초기 도읍지를 고려하였을 때 호남의 기준으로 한강을 추론하고 있다. 이을호는 판소리 시원지가 충청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 꽃 피운 사실을 들어 충청도와 전라도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호남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기준으로 한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지명 등장 시기가 고려 시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조선 시대 이후 지리적 범위가 변화되었다는 가정을 전제할 때 ‘호남’이란 명칭의 호의 기준은 한강일 가능성이란 점에서 가능성이 있다[조성욱, 2008].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호남은 전라도 지역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호남’이라는 지명의 지리적 범위 변화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지만 ‘호남’의 명칭은 고려 성종 때 만들어진 10도 명칭 가운데 한강을 북의 강이란 의미의 ‘하’로 인식하고 ‘하남도’란 명칭을 사용하고 남쪽 강이란 의미로 금강을 활용하여 ‘강남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 사실을 고려할 때 결국 금강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이 ‘호남’이란 광역 공간에 대한 명칭의 연원은 결국 자연지리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간 분할의 기준이 되는 호수나 강을 기준점으로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형성된 역사, 문화적 상황들이 그 지역의 성격과 특성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파악된다.

[익산의 황등호 유래설]

호남의 명칭 유래와 관련하여 반계 유형원[1670]은 호남은 3호[벽골제, 황등제, 눌제]의 남쪽이라고 하면서 3호를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이 3호 가운데 익산 지역의 황등호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 문헌인 『문헌비고』에서는 ‘황등호(湖)’를 ‘구교호(龜橋湖)[일명 요교호(腰橋湖) 또는 황등호]’라 하였으며 호의 둘레가 25리[약 9.82㎞]에 이른다고 하였다. 황등호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고부의 눌제(訥堤)와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으로써 호남 3호의 칭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호남[전라도]과 호서[충청도]라는 명칭의 유래도 황등호(湖)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황등제로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어 조선 철종 말까지는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호남의 황등제, 벽골제, 눌제를 잘 정비한다면 노령산맥 이남은 흉년이 없을 것”이라고 저술하고 있다. 또한 『동아일보』 1926년 7월 17일 ‘익산지방대관’에서 요교호(腰橋湖)[裡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교호: 북일, 삼기, 팔봉, 황등 등 8개 면에 둘러싸였으되 조선 제일의 담수호로 최장경 15리[약 20.03㎞], 주위 80여 리[약 31.42㎞]가 되며 수심 6척여이다.”

이는 앞서 조선 시대 기록 내용보다 규모가 더 큰 상황으로 ‘조선 제일의 담수호’라는 표현에서 그 규모가 당시에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요교호에 대하여 “미륵산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금천에서 발원하여 오늘날 황등면, 삼기면, 월성동, 신용동 부근의 넓은 들에 자리한 큰 호수가 있어 나룻배로 건너다녔다.”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에서 강경으로 넘어가는 길[국도23호선]을 지나다 보면 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는데 이를 ‘허리다리’라고 한다. 허리다리 안쪽[금마 방향]으로 요교호가 존재하였으며, 요교호를 가로지르는 제방[뚝]이 있었는데, 길이가 약 1.3㎞였다고 한다. 현재 국도23호선 길목에 있는 허리다리[요교] 옆에는 황등제의 존재를 입증하는 요교비가 세워져 있다. 요교비에는 일제 강점기 황등제 수축 공사를 하던 도중 발견된 비석으로, 1780년(정조 45) 무너져 내린 제방을 수축하는 공사와 교량을 가설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요교호는 백제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관련 문헌에 나타난 요교호의 존재와 황등면에 도선[배 나들이]마을, 뱃길마을, 어곳마을, 섬말[섬마을], 샛터 등 수로와 관련이 된 지명이 요교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이 같은 요교호의 존재는 익산의 옛 명칭 금마저의 실체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즉, 익산의 옛 명칭 금마군은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으로, 저(渚)는 물가라는 의미로 물에 둘러싸인 곳이란 뜻이다. 즉, 금마저는 금강과 연결되는 하류 지역[강경, 망성, 용안, 성당, 웅포 일대]의 공간과 연결되어 현재 금강만경강으로 둘러싸인 옥구, 임피, 함열, 금마 지역의 공간으로 결국 금강만경강 두 강에 의하여 영역이 남북 지역으로 제한된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특히, 삼각주라는 의미의 ‘저(渚)’라는 표현에 부응하는 물에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또한 1920년대 지도에서 확인되듯이 현재의 군산 및 구 이리 지역은 대부분이 간척된 지역으로 지도에 나타난 간척 부분은 만조 시에 침수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육지 공간을 재구성하면 만경강 하류 유역은 거의 바다와 갯벌이다. 또한 황등호 지역의 둘레와 규모를 감안할 때, 익산 지역의 금강 연접 지역의 공간으로서 황등호는 익산의 옛 지명 금마저의 지형을 규정하는 호수로서 ‘호남’이란 개념의 중요 연원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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