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82
한자 義兵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한일병합 전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익산 지역은 대체로 낮고 평탄한 구릉지와 넓은 평야가 많아서 의병 투쟁에는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의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익산 지역의 의병과 주요 활동]

익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과 익산 출신 의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익산 지역의 의병 활동은 평야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주로 군자금 모집이 많았다. 낭산면 출신인 김운익(金雲益)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성근(李聖根), 김성천(金聖天), 문명국(文明國), 배을룡(裵乙龍) 등을 규합하여 기병하였다. 김운익 등은 1905년 12월 20일 용안군청을 습격하여 군수를 결박하고 징수해 놓은 세금 5,054원 38전을 탈취하였다. 1908년 4월 익산군 화배 김사련 집에 들어가 군자금 400원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주변 지역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창의한 후 4년 동안 익산을 중심으로 잠행하면서 끈질긴 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 체포되어 1910년 1월 전주 재판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기협(李基浹)은 1907년 12월 초순 임사유(林士有), 임덕겸(林德兼), 한만보(韓萬甫)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창의 기병하고 웅포면 김 감찰 집에서 군자금 170냥, 유화삼 집에서 군자금 60냥을 거두었다. 의병대는 이후 1년 반동안 여산, 함열 지역을 잠행하면서 여러 차례 유격전을 벌였는데 임사유는 1908년 6월 유격전에 사용하던 화승총과 환도를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기준(李己準)은 서성군(徐成君)·최윤보(崔允甫)·최성삼(崔成三) 등 동지를 모은 후 총과 도검으로 무장하고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12일 동지 십수 명과 용동면 매약상 박덕효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한 후 이동하던 중 강경경찰서 경찰대와 교전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추기엽(秋琪燁)은 1907년 육군 참위로 복무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익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활동 중 피체되었다. 1908년 전북재판소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복역 중 두 달 후 탈출하였다. 탈출 후에는 전라남도 지방으로 내려가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익산 출신 의병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이규홍이 있다. 이규홍은 1906년 박이환(朴駬桓), 문형모(文亨模)를 규합하고 4월 24일 임병찬을 찾아가 최익현을 만나서 포부를 피력하였다. 며칠 뒤 다시 임병찬을 찾아 스승을 삼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규홍은 의병장으로서 집에 비축되어 있는 곡물과 약 500마지기 넘는 전토를 방매하였다. 자금이 마련되자 박이환의 형인 박영식(朴永植)으로 하여금 총포와 화약을 구입하게 하였다. 병졸은 박이환, 문형모의 주선으로 전주 감영의 해산 병정 100여 명을 모집하고 각처에서 자원하여 온 의병 100여 명과 산포수·지사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진안, 장수, 용담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가면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일본군 44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고 아군 7명이 전사하였다.

송진행삼기면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이석용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안, 장수, 임실 등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익산 지역 의병 활동의 특징]

산악지대에서 있었던 유격 투쟁과 달리 평야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군자금 모금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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