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87
한자 小作爭議
영어공식명칭 Tenancy Disput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 조선소작인상조회 익산지회 설립

[정의]

일제강점기 불합리한 소작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소작인들이 익산 지역에서 벌인 운동.

[개설]

익산의 자연환경은 농업에 적당하며 기후 또한 온난해서 농작물 발육에 좋았다. 특히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리조합이 설립되는 등 수리시설이 갖춰지면서 한해와 수해의 피해를 비교적 적게 받았던 쌀농사는 익산을 대표하였다. 1899년 군산 개항 이후 익산에는 농장을 개설하려는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개 대농장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대지주에 의한 토지 집중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작지율도 높아져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전북[77.1%] 평균보다도 높은 80%에 달하였다. 익산 지역은 전국적으로도 지주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 중 하나로 농업이 발달한만큼 소작인들은 불합리한 소작 조건에 시달려야 하였고 결국 개선을 요구하는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소작인상조회 익산지회]

조선소작인상조회는 1921년 8월 27일 송병준이 참정권을 획득하고 소작인의 항일 의식을 무마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이다. 그러나 전국에 지회가 설립되면서 설립 목적과 다르게 농민들의 이익을 위한 농민 단체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을 접한 지식인들이 지회의 지도자가 되면서 조선소작인상조회의 성격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조선소작인상조회 익산지회는 1922년 3월 27일 설립되었다. 서울 본부에서 내려온 윤익선이 ‘소작인의 복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후 창립총회를 열었는데, 입회한 회원이 200여 명이 되었다. 곧바로 임원진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에 김현창, 부회장에 김병희, 평의원에 임종환, 정병환 등 20명이 선출되었다. 1923년 3월에는 익산소작인상조회에서 소작인 대회를 열었는데 여러 명의 지주와 800여 명의 소작인이 참석하였다. 소작인 측의 요구와 지주 측 답변이 이어진 가운데 양측의 합의로 1. 적어도 3년 이상의 기한을 정하고 과실이 없는 소작인은 함부로 이동하지 않을 것, 2. 소작료는 전 수확은 50% 이내에서 정할 것, 3 지세 및 모든 공과금은 소작인이 부담하지 않을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익산 지역의 농장]

익산 지역에는 금강이 서북쪽 경계를 굽어 흐르며 탑천이 남서쪽으로 흘러 만경강 하구로 흘러들어가는 등 하천이 발달하였고 하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 같은 일본인 토지회사·대농장 뿐만 아니라 조선인 대농장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인 농장으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 전북농장·우근상사주식회사 남선출장소(右近商社株式會社 南鮮出張所)·세천농장(細川농장)·대교농장(大橋농장)·삼중농장(三重농장)·다목농장(多木농장) 등이, 조선인 농장으로는 화성농장(華星농장)·서성농장(西成농장) 등이 있었다. 적게는 수백 정보에서 일천 정보가 넘는 소유지를 소작 경영하면서 중간 관리인으로 농감(農監)[지주를 대신하여 소작인을 지도, 감독하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사음(舍音)[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을 채용하였는데 중간 관리인으로 채용된 이들이 소작인에게 농간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본인 농장에서는 소작 계약을 1년 단위로 하면서 소작지 이동이 자주 일어나게 되어 소작인들의 불만이 많았고, 소작인들이 쟁의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수리조합 반대운동]

불이농장 주인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는 값이 저렴한 황무지, 간척지 등을 대량으로 매입하였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리시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발동기, 양수기 등으로 수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리조합 설치 계획을 세우고 공사를 준비하였다. 후지이 간타로의 ‘수리조합 설치 계획’’은 황등의 요교제를 복구하여 익산군 황등면, 북일면, 오산면과 옥구군 서수면, 임피면, 대야면 일대에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받았던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는 요교제 복구 과정에서 수몰되었고 척박한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은 수리조합을 통해 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후지이 간타로는 1920년 익옥수리조합 설립에 착수하였는데, 만경강 강변 지역에 취입로가 통과함에 따라 수해 때 배수 불량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1920년 7월 익옥수리조합 설치 공사가 시작되고 9월 20일 익산군 대장촌 농민들이 수리조합 설치에 반대하여 철폐를 요구하는 항쟁을 벌였다. 수리조합의 취입로가 통과하는 9개 지역의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합세하면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 권력의 비호 하에 진행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수리조합 설치 반대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리조합이 설립된 이후인 1924년, 1931년 배수의 장애가 되는 수리조합의 제방을 무력으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반대운동은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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