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412
한자 支石墓
영어공식명칭 Dolmen
이칭/별칭 지석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선사/청동기 시대
집필자 이병호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개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 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며 고대 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잘 보여 주는 기념물이다.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는 근대까지 고인돌이 남아있던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는 단 1기의 고인돌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인돌의 여러 형태]

고인돌은 지면 위에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어 눈에 잘 띄는 것이 특징이다. 고인돌은 윗돌[상석]을 받치는 받침돌의 형태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먼저 지상에 윗돌과 받침돌이 높이 올라와 있어 마치 탁자처럼 보이는 탁자형(卓子形), 둘째 지면에서 낮게 4~5개의 받침돌로 윗돌을 고여 마치 바둑판처럼 보이는 바둑판형, 셋째 지면에 받침돌 없이 윗돌만을 지면에 바로 놓은 형상 등이다. 어떤 모양이든 거대한 자연 암석을 윗돌로 사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인돌의 부장품]

고인돌은 큰 돌로 덮개돌을 사용해서 거대하게 보이는 외관과 달리 하부 매장 시설은 대부분 소형이다. 일부 고인돌은 성인의 시체를 바로 눕혀 묻거나 펴서 묻기에 부적합한 것들도 있다. 고인돌의 부장품은 다른 무덤에 비하여 극히 빈약하다. 대부분 간석기[마제석기(磨製石器)]와 민무늬토기편[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 간혹 홍도(紅陶) 등이 발견된다. 간석기에는 돌칼[석검(石劍)]과 석촉(石鏃)이 가장 많고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와 돌도끼[석부(石斧)]가 소수 발견되었다.

민무늬토기는 주로 매장 주체 시설 밖에서 파편 상태로 발견되는데, 의례 후 일부러 깨서 묻은 것으로 추측된다. 홍도는 전체적으로 보면 수량이 적은 편이지만 같은 시대의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나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에 비하여 많은 편이다. 홍도는 주거지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실생활 용기라기보다는 매장 의례용 토기로 추측된다.

청동기 등 금속제 부장품의 출토는 더 희소하다. 고인돌에서 청동기가 출토된 지역은 고흥 운대리, 순천 우산리, 여수 오림동, 여수 평여동 등 남해안 지역이 우세하다. 여수 적량동 상적의 고인돌군에서는 비파형동검 7개와 동모(銅矛) 1개 등 8개의 청동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와 익산의 고인돌]

전라북도 내륙 지역의 고인돌 분포 상황을 보면 금강만경강, 동진강, 섬진강 등 주요 수계(水系)를 따라 군집을 이루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금강 수계는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 등 금강 상류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며 만경강 수계에서는 완주군 덕천리 고인돌이 가장 밀집되어 있다.

현재 익산 지역에서는 단 한 기의 고인돌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익산에 고인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의 유명한 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금마 지역의 고인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다음 날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기이한 자취가 보통과는 달랐다.”라고 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미 금마 지역의 고인돌이 소문이 나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이규보가 일부러 익산 지역의 고인돌을 방문하여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황등면에 1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일제 강점기 흑백 사진에 남아 있다. 일본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1915년 촬영한 황등면 고인돌은 넓은 상석 위에 소년이 앉아 있는데 고인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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