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452
한자 益山彌勒山城
영어공식명칭 Iksan Mireuk Mountain Fortress
이칭/별칭 기준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124-1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
집필자 김규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3년 6월 23일연표보기 - 익산미륵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0년~1991년 - 익산미륵산성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 익산미륵산성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 - 익산미륵산성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익산미륵산성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익산미륵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익산미륵산성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124-1 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포곡식 산성
관련 인물 준왕|무왕
크기(높이,길이,둘레) 1,776m[둘레]
면적 177,109㎡
관리자 익산시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에 있는 백제 시대 산성.

[개설]

익산미륵산성(益山彌勒山城)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사지 뒤쪽 미륵산[해발 430m] 최정상부와 동쪽 사면을 감싼 포곡식 산성으로 기준성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산성의 북쪽은 논산·부여까지 조망되며, 낭산산성·선인봉산성 및 당치산성 등도 볼 수 있다. 동쪽으로 용화산성천호산성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서쪽으로 낮은 구릉 지대와 함께 함라산성·어래산성금강이 조망된다. 남쪽은 익산 토성, 금마도토성과 함께 왕궁리 유적만경강을 낀 삼례·전주·김제 지역까지 조망되어 비교적 낮은 지형에 만들어진 산성이지만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둘레가 3,900척[1,181m]이고, 높이가 8척[2.5m]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때까지도 성곽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미륵산성에 군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익산미륵산성이 퇴폐된 사항을 기록하고 있어 18세기 후반에는 성곽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익산미륵산성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익산미륵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와유록』, 『익산군지(益山郡誌)』 등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미륵산성준왕(準王)이 쌓았다 하여 ‘기준성(箕準城)’으로도 불린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는 마성이 익산미륵산성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익산미륵산성의 초축 시기에 대해서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전하는 준왕(準王)이 쌓은 성이라는 설과 백제 무왕이 쌓았다는 설 등이 있다.

[위치]

익산미륵산성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124-1번지 일원에 있다.

[형태]

익산미륵산성미륵산의 최정상부와 동쪽 사면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익산미륵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산성의 둘레는 1,776m에 이르며, 동문지·남문지·치성 10개소·옹성이 남아 있다. 성내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계곡부를 중심으로 건물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익산미륵산성의 축성 방법은 지형에 따라 외벽만 석축을 쌓고 성의 안쪽은 석재 및 토사를 다져서 축조한 내탁법과, 성벽 내벽과 외벽을 모두 일정한 높이까지 석축으로 쌓은 협축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익산미륵산성의 전체 길이는 1,776m로 실측되었다. 성곽의 평면 구조를 보면, 표고 428m인 미륵산 최고봉을 감싸 성곽의 서남 모서리가 이루어져 있고, 그 북쪽 표고 402m의 봉우리를 감싼 서북 모서리가 있다. 이 사이의 거리는 375m이며, 중간에 규모가 크지 않은 서문을 두고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동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구릉 남사면을 따라 남쪽 성곽이 이어지는데 동남 모서리까지의 거리는 490m이고, 7부 능선에 남문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있는 봉우리에서 동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구릉 북사면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는데 북동 모서리까지의 거리는 560m이며, 여기에서 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동쪽 성벽의 거리는 270m로 계곡 바로 옆에 옹성을 갖춘 동문이 있으며, 동문 좌우 높은 곳에 적대가 있다. 동문 북쪽에서는 수구지가 확인되는데, 미륵산 정상에서 수구지까지 높이는 212m 차이가 난다.

성벽의 폭은 8.7m 내외인데, 거칠게 다듬은 두께 20㎝ 내외의 석재를 이용하여 줄을 맞추어 쌓은 평적쌓기를 하였으며, 내부는 잡석과 마사토로 채웠다. 체성에는 성문 좌우에 외부로 돌출된 치성인 적대 2개소를 포함하여 모두 11개소의 치성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2016년 발굴 조사에서 서남 모서리에 1개소가 더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곽 내부의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표고 278m에서 320m지점까지 165m 범위에 8단의 석축 위에 9개소의 건물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일부 건물지들은 발굴 조사되었다. 미륵산 정상에서 동쪽 80m 지점에서도 동서 25m, 남북 50m 규모의 건물지가 확인된다.

동문지가 있는 지역은 토사가 많이 밀려오는 관계로 처음 축조한 뒤 2차례 올려 쌓아 3차에 걸친 문지가 확인된다. 동문은 4차에 걸쳐 유구가 중첩되어 있어 처음 전면 3칸의 문루가 있었던 것을 최후에는 전면 1칸으로 작게 줄였으며, 성벽의 축조 상태로 보아 마지막 단계에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밖으로 덧대어 쌓은 성벽인 옹성이 설치되었다. 옹성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개구부는 동문의 출입구와 방향을 달리하여 직각으로 배치한 편문식(片門式)이다. 동문지 북쪽에서는 수구지가 조사되었다. 대형의 화강암 할석재를 거칠게 다듬어서 축조하였으며, 폭 0.75m, 높이 0.6m 규모이고, 개구식(開口式)으로 되어 있다.

남문지는 3차에 걸친 유구가 조사되었다. 초축 시기 문지는 알 수 없으나, 점차 규모를 축소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옹성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성문은 외벽에서 2m 이상의 높이에 문을 만든 현문식(懸門式)이다.

옹성은 남쪽 체성에서 돌출부를 두고 출입구를 두었다. 돌출부는 410㎝ 가량 나왔으며 너비 810㎝로 옹성의 폭보다 넓다. 출입구의 폭은 380㎝이다.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까운데 옹성과 체성과 접합부인 서쪽은 19m인 데 반하여 동쪽은 16.8m로 작다. 남쪽의 길이는 17.1m이나 북쪽은 15.8m로 작다. 최고 2.2m의 높이로 남아 있다. 옹성 내부에는 배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체성에 덧대어 쌓은 적대는 남쪽 적대가 동문지 중심에서 30m가량 이격되어 있고, 높이 차이는 12m 정도이다. 평면은 틀어진 방형의 형태이다. 각각의 폭은 동쪽 8.1m, 서쪽 7.5m, 남쪽 6.9m, 북쪽 8.6m의 크기이고, 북벽은 2.9m 높이로 남아 있다. 체성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는 북쪽 적대는 평면이 틀어진 방형의 형태인데 9m 내외의 규모이다.

수구지는 일부만 남고 대부분 파괴되었다. 출수구의 크기는 높이 50㎝, 폭 70㎝이다. 대형 할석으로 축조된 수구는 바닥에 평평한 돌을 깔고 양쪽에 벽체를 세운 후 장대석으로 덮은 구조이다.

내부 건물지는 성곽의 중심부로 흐르는 계류 남쪽에 모두 9단의 석축 위에 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 1~5단 석축 위의 건물지를 조사하였다. 1단과 2단에서는 별다른 건물지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3~5단 석축에서는 모두 1차 통일신라 시기, 2차 고려 시기, 3차 조선 시기에 걸친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2016년 조사는 익산미륵산성미륵산 정상부에서 추정 장대지와 치성이 확인되었다. 장대지에서는 서쪽에서 구들을 갖춘 건물지 1기와 굴립주건물지 1기가 확인되었다. 구들과 잔존하는 석렬로 보아 건물지는 길이 11.76m, 폭 5.66m 크기이다. 구들은 3열로 배치되어 있으며, 아궁이로 판단되는 아궁이 양쪽에 세운 봇돌이 노출되었다. 유물은 백제 때의 토기편은 확인되나 기와는 보이지 않고, 통일신라 이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현황]

익산미륵산성미륵산 최정상부와 동쪽 사면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산성으로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석성이다. 2019년 현재 동문지와 남성벽을 비롯한 일부 구간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1990~1991년, 2004년, 200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2016년 전북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익산미륵산성기자조선 준왕이 쌓은 성이라는 설과 백제 무왕이 쌓았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세기에는 성곽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므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축성 시기와 변천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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