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재유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58
한자 四勿齋遺稿
영어공식명칭 Samuljaeyug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재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사물재유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사물재유고』 간행
소장처 전북대학교 도서관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금암동 663]
성격 한시집
저자 소건
편자 소진호|소상영|소학규
간행자 소진호|소상영|소학규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7.2×19.3㎝
어미 내향 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권수제 사물재일고(四勿齋逸稿)
판심제 사물재일고(四勿齋逸稿)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전기 유학자 소건의 시집.

[개설]

『사물재유고(四勿齋遺稿)』는 조선 전기의 유학자인 소건(蘇建)[1518~1582]의 한시를 모은 시집이다. 소건진주소씨(晋州蘇氏)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익산 땅에 세거하였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금마면 일대에 해당한다. 『사물재유고』 역시 익산 지역 후손인 소진호(蘇鎭浩)·소상영(蘇祥永)·소학규(蘇學奎) 등이 1935년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에 있는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건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자는 대립(大立), 호는 사물재(四勿齋), 본관은 진주이며,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출신이다. 고조는 소희(蘇禧), 증조는 소효식(蘇效軾), 조부는 소자파(蘇自坡), 아버지는 소세공(蘇世恭)이며 어머니는 최지강(崔至康)의 딸이다. 부인은 양성이씨(陽城李氏)이다. 1540년(중종 35)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 55위로 합격하였다. 박순(朴淳)·정철(鄭澈)·정종영(鄭宗榮) 등과 교유하였다. 사화에 휘말리던 작은아버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잃고 출세의 뜻도 접고 은둔하기 시작하였다. 거처를 ‘사물재’라 이름 지었는데, 사물이란, 중국 남송의 정자(程子)가 이야기한 ‘사잠언(四箴言)’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 삼갈 것에 대하여 경계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건은 사물재에서 시와 술을 즐기며 지내다가, 1582년에 생을 마감하였고, 익산 동북쪽에 있는 용화산에 안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소건의 작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소건의 먼 손자뻘 소학규는 『사물재유고』의 서문(序文)에서 “화재를 당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문장이 습작에 지나지 않아 자랑할 만큼 뛰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없애지는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였다. 그런데 소건의 후손인 소시운(蘇始運)은 발문에서 “임진왜란을 겪으며 궁궐과 백성의 민가가 모두 불탔다. 사물재의 집도 이 재난을 만났다면 문집 전체가 소실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보물은 태워도 화염이 구슬은 태우지 못하며 진주는 비록 물에 빠져도 진주의 밝은 빛은 거품이 되지 않는다. 그처럼 여기 약간 남은 사물재의 시는 아마도 높은 산 높은 벼랑을 바라보듯 위로는 안자(顔子)의 학문을 잇고 아래로는 정자(程子)의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후손 소상영은 “사물재 선조가 남긴 이 몇 편의 시와 재호(齋號)는 마치 시경 삼백 편(三百篇)을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라고 한 것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태/서지]

2권 1책 16장의 목활자본으로,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은 21.5×16.2㎝, 10행 20자, 어미는 내향 삼엽화문어미(內向 三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29.7×19.8㎝이다.

[구성/내용]

책머리에는 『사물재유고』를 간행하던 을해년(1935년) 5월에 소학규가 쓴 서문이 있고, 책 끝부분에는 같은 시기에 소동규(蘇東奎)·소상영·소진호가 각각 쓴 발문이 있다. 특히, 발문 중에는 5대손 소대려(蘇大呂)가 쓴 것과 7대손 소시운이 쓴 것이 함께 실려 있다.

권1에는 총 열네 수의 시문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제반구당(題伴鷗堂)」 두 수는 유희춘(柳喜春)을 찾아 반구당의 주변 경치와 어려운 자신들의 처지를 그려낸 내용이다. 그 밖에는 진사 유승춘(柳承春)에게 보내는 시 한 수와 자신을 위로하는 자견(自遣)시 세 수, 이별의 증표로 사촌 형에게 보내는 시 한 수,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菴) 박순(朴淳)에게 부치는 시 네 수, 사람에게 보내는[贈人] 시 두 수, 그리고 정종영(鄭宗榮)에게 준 시 한 수이다. 그 외에 부록의 시 두 수는 숙부인 쌍봉(雙峰) 소세검(蘇世儉)소건에게 보낸 시와 유승춘이 소건에게 보낸 시 한 수, 그리고 7대손 소시운이 쓴 가장(家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시문 중 박순이 영의정 자리에 있을 때 소건이 보낸 네 수의 칠언절구가 있는데, 그중에서 첫 시 「기정박상국사암순(寄呈朴相國思菴淳)[영의정 사암 박순에게 드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망쟁영고여기(時望崢嶸皐與夔)[때로 높은 봉우리 바라보며 조심하시게]

청년대상사공수(靑年台相似公誰)[젊은 나이에 영의정 된 그대 같은 누가 있겠나]

묘모우국성무가(廟謨憂國誠無暇)[나라를 위한 걱정으로 한가할 틈 없겠지만]

능기천남일구지(能記天南一舊知)[남쪽의 사는 옛 친구 잊지는 않았겠지]

이 시문은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박순이 젊은 나이에 영의정이 된 것을 축하함과 동시에 부디 몸조심하라는 뜻이 담긴 시이다. 영의정이라면 위로 임금 한 사람밖에 없으나 아래로는 문무백관 이하 만백성이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이니 이제는 내려올 일만 남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한 번씩 옛정을 생각하여 남쪽에 사는 벗인 본인을 기억하여 달라는 구절에는 그리움이 묻어난다.

[의의와 평가]

『사물재유고』는 현재 전하여 오는 조선 선비들의 문집 중에서도 가장 적은 분량에 속한다. 한시 열네 수를 문집으로 남긴 것은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열네 수의 시보다 부록의 양이 훨씬 많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손들이 소건을 기리며, 서문과 발문을 여럿 더하여 『사물재유고』를 발간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소건소세양의 낙향을 계기로 익산에 은둔하였지만, 그 인품과 역량을 기리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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