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진당연행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68
한자 葆眞堂燕行日記
영어공식명칭 Bojindang Yeonhaengilg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33년~1534년연표보기 - 『보진당연행일기』 저술
편찬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보진당연행일기』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보진당연행일기』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소순
편자 소진덕|소병관
간행자 소진덕|소병관
권책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30.6×19.6㎝
어미 상하향삼엽 화문어미(上下向三葉花紋魚尾)
권수제 보진당연행일기
판심제 보진당연행일기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소순이 쓴 연행 일기.

[개설]

『보진당연행일기(葆眞堂燕行日記)』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출신인 소순(蘇巡)[1499~?]의 연행 일기이다. 소순이 1533년 12월 명나라 세종(世宗)의 황태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소세양(蘇世讓)이 연경[북경의 옛 이름]에 진하사(進賀使)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소순은 자제군관으로서 소세양(蘇世讓)을 수행하면서 1533년 12월 1일부터 1534년 5월 13일까지 190일간의 일을 매일 기록하였다. 이 글은 1935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순은 자는 경부(警夫), 호는 보진당(葆眞堂),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부친은 첨사 소세온(蘇世溫)이고 모친은 임지(林祉)의 딸 익산임씨(益山林氏)이다. 둘째아버지 소세량(蘇世良)[1476~1528]에게 수학하여 문장과 서예로 이름을 떨쳤고, 1519년(중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3년 작은아버지 소세양이 명나라 황태자 탄생 진하사로 연경에 가게 될 때, 자제군관으로서 모시고 갔다. 명나라 예부상서 하언(夏言)이 소순의 필적이 강건하고 정묘함을 크게 칭찬하고, 『주사집(奏謝錄)』, 『교사집(郊祀集)』, 『춘추(春秋)』 두 질, 『주자시집(朱子詩集)』 등 여러 서책과 필묵(筆墨)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저서로 1책 58장의 『보진당연행일기』가 전해진다.

[편찬/간행 경위]

소순이 지은 글은 화재로 말미암아 대부분 불에 탔다. 다만, 연행일기 한 권만 남았으나,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후손 소진덕(蘇鎭德)과 소병관(蘇秉寬)이 논의하여 1933년에 소순의 비석을 세우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소순의 연행일기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소학규(蘇學奎)의 검토를 거쳐 1935년 『보진당연행일기』가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1책 58장의 목활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의 크기는 21.6×16.3㎝, 10행 20자이다. 어미는 상하향삼엽 화문어미(上下向三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30.6×19.6㎝이다.

[구성/내용]

『보진당연행일기』는 서문과 본문, 부록과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934년 겨울 소학규가 작성하였는데, 소순의 학행과 일기 간행 경위를 설명하였다.

연행사 일행은 1533년(중종 28) 12월 16일에 출발하여 이듬해 4월 28일 결과를 보고하였기 때문에 160여 일이 소요되었으나, 일기는 1533년 12월 1일 익산의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린 것부터 시작하여 5월 13일 지금의 익산시에 속하는 전라도 여산군의 집에 돌아오기까지 190일 동안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소세양『양곡집(陽谷集)』「양곡부경일기(陽谷赴京日記)」에는 "자세한 내용은 『보진당일기』를 통해서 보충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책을 일컫는 것이다.

일기의 주요 이동 경로를 살펴보면, 1533년 12월 8일 사당에 고한 뒤 출발하여 14일 한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하였다. 12월 18일 새벽에 연행사 일행을 만나 함께 길을 떠났다. 고양의 백제관, 파주의 동파관, 개성의 태평관, 평양의 대동관을 거쳐 1534년 1월 16일 의주에 도착하였다. 1월 21일 압록강을 건너 책문을 지나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다시 요양(遼陽),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에 이른다. 산해관부터는 중국 땅이다. 옥전현(玉田縣), 계주(薊州)를 지나 2월 25일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이르게 된다.

내용은 크게 노정(路程)·풍물(風物)·시문(詩文) 등으로 나뉜다. 대체로 압록강에서 북경까지는 2,000여 리나 된다. 저물녘에 소릉하(小凌河)에 다다랐으나 물이 불어 강을 건너지 못하여 어려웠던 일[2월 10일], 연산관 숙사에서 중국에 기근이 들어 백성이 사람을 잡아먹기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일[2월 12일], 비바람 속에 흙탕물을 건너다가 빠져 어려움을 겪은 일[3월 18일], 청석령에서 움막을 짓고 비바람을 견디던 일[4월 5일] 등 중국을 오가는 중에 겪었던 고난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북경의 숙소인 옥하관에 머무른 기간도 40여 일이나 되는데, 국자감 관람, 역대 제왕묘 참배, 유구(琉球) 사신 방문, 중국 관리 접견 등의 일자가 소상하다. 3월 6일에는 예부에 내린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그 밖에 고죽군(孤竹君) 옛 성, 이제묘(夷齊墓), 사호석(射虎石), 서책 장사 등의 풍물기라든지 이백(李白)·두보(杜甫)·소식(蘇軾) 등 시문과 관련되는 기사들을 통하여 소순의 학문과 관심사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은 진하사, 서장관, 질정관, 압마관, 중국·일본·여진 등의 통역관, 자제군관, 노비 등 동행한 인물의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1933년 3월 상순에 소학규가 지은 「소순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머리는 1934년 후손 소진덕이 지은 발문과 1935년 소병관이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보진당연행일기』은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연행일기 중 가장 연대가 앞선 것으로서 문헌적 가치가 크며, 생생하게 체험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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