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암유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77
한자 一菴遺稿
영어공식명칭 Ilamyug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일암유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일암유고』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소진석
편자 소화영|정기성
간행자 소화영|정기성
권책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30.7×19.8㎝
어미 상하향 삼엽화문어미(上下向三葉花紋魚尾)
권수제 일암유고
판심제 일암유고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개화기 유학자 소진석의 문집.

[개설]

『일암유고(一菴遺稿)』는 개화기 유학자 소진석(蘇鎭碩)[1869~1910]이 남긴 문집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출신인 소진석은 과거 공부에는 매달리지 않고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서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소진석은 세상을 뜰 때까지 『강설(講說)』 두 권과 여러 유고들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그런 바람에 소진석이 갈고닦은 학문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1935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일암유고』에 나오는 여러 시와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1책 47장으로 간행된 『일암유고』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진석은 자(字)는 정숙(正淑), 호는 일암(一菴)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소자파(蘇自坡)의 큰아들인 소세온(蘇世溫)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소창규(蘇昌逵), 어머니는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지영(鄭志榮)의 딸이다. 1887년 서울에서 선비가 늙어서까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과거 공부 대신 구도에 전념하였다. 인산 소휘면, 몽암(夢庵) 한행(韓涬)에게서 수학하였다. 소휘면이 타계한 뒤에도 꾸준히 배움을 갈고닦으며 경전 연구를 계속하였고, 서당에서 예의 바른 범절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마흔 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종질인 소화영(蘇華永)과 제자 정기성(鄭基聲) 등에 의하여 1935년 문집이 간행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소진석이 세상을 뜨고 나서 집 안에 화재가 일어나는 바람에 『강설』 두 권과 유고 대부분이 불에 타 버리고, 그나마 남은 시문은 초년에 지은 것뿐이었다. 이것을 소화영과 정기성이 다시 편집하여 1935년 문집을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47장으로 된 목활자본 1책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은 21.7×16.2㎝, 10행 20자이다. 주는 쌍행이며, 어미는 상하향 삼엽화문어미(上下向三葉花紋魚尾)이며, 크기는 30.7×19.8㎝이다.

[구성/내용]

책머리는 1935년 5월 하순 소학규(蘇學奎)가 작성한 「일암유고 서(一菴遺稿序)」이다. 소진석이 일찍이 과거와 벼슬의 뜻을 접고 스승인 인산 소휘면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소휘면이 타계한 뒤로도 아침저녁으로 학문을 닦으며 경서를 연마한 훌륭한 학자라는 것, 소진석이 죽고 나서 그 제자 정기성과 소화영이 주관하여 문집을 간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권1은 시 서른네 수, 서(書) 열여덟 편이다. 시는 「서회(書懷)」, 「심성(心性)」 두 수, 「서회(書懷)」 두 수, 「인친(仁親)」, 「민시(憫時)」, 「계종질화영(戒從姪華永)」, 「우계종질화영독서(又戒從姪華永讀書)」, 「계서생(戒書生)」, 「즉경(卽景)」, 「우제(偶題)」 두 수, 「유거(幽居)」, 「옥봉삼가재증별운(玉峯三可齋贈別韻)」, 「자술(自述)」, 「제광학재벽상(題廣學齋壁上)」, 「제유씨쌍계정(題柳氏雙溪亭)」, 「차임피낙영당운(次臨陂樂英堂韻)」, 「차삼가재운(次三可齋韻)」, 「차개접운(次開接韻)」, 「등임피오성산(登臨陂五聖山)」, 「유사자암(遊獅子庵)」 두 수, 「임인삼월향음주례후작(壬寅三月鄕飮酒禮後作)」, 「탄세(歎世)」, 「여정기성(與鄭基聲)」, 「자탄구호(自嘆口號)」, 「근차이송아수연운(謹次李松哦晬宴韻)」, 「부용전운증종질화영(復用前韻贈從姪華永)」, 「입춘시(立春詩)」, 「술회(述懷)」, 「희우(喜雨)」, 「우음(偶吟)」 등 서른네 수인데, 서당에서의 독서, 여러 학생들에 대한 당부, 향음주례(鄕飮酒禮)[온 고을 유생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던 일], 주변의 경물시 등이 대부분이다. 서는 이순형(李舜衡), 소승규(蘇昇奎), 서기홍(徐基鴻), 이염응(李琰應), 서병조(徐丙照), 소진구(蘇鎭九), 임형순(林亨淳), 최석인(崔錫仁), 서정교(徐廷敎), 홍문표(洪文柄), 강성교(姜聲敎), 소상영(蘇祥永), 이창원(李彰遠) 등 교유하는 인물이나 종중, 문인 등과 안부를 묻거나 경서나 도의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내용이다.

권2는 서(序), 제문(祭文), 문답(問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외종사촌인 권명국(權明國)의 부탁으로 지은 예의와 학문을 권장하는 「흥학계서(興學契序)」, 익산의 금마 동도리에 사는 이휴언(李休彦)의 부탁으로 쓴, 부모상 때 상부상조를 권하는 「위친계서(爲親契序)」, 익산 용화산 기양촌의 서당에서 송암(松庵) 선생을 기리는 계에 대하여 글을 지은 「기양당계서(岐陽堂契序)」이다. 제문은 먼 아저씨뻘인 난곡(蘭谷) 소승규가 죽었을 때 보낸 제문이다. 문답은 경학과 성리설, 예학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답한 글이다.

권3은 부록으로, 소진석이 세상을 뜨고 나서 지어진 만장(輓章), 가장(家狀), 묘표 등이다. 만장은 총 아홉 수로, 제자들이 지은 것이 일곱 수이다. 가장은 소화영이 지었고, 묘표는 1914년 3월 이사희(李思僖)가 지었다. 책 끝머리의 발문은 1935년 5월 정기성과 소화영이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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