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97
한자 全羅道礪山府晋州姜氏戶籍文書
영어공식명칭 Jinju Gang Family Register Document in Jeolla-do Yeosan-b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15[하학리 산9-1]|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807년~1882년 - 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 작성
소장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15[하학리 산9-1]
성격 문서
관련 인물 강순창|강주호|강도일|강번|강도보|강주원|강주한[강이한]|강추|강훈|강도명|강도보
용도 호구단자|가족관계 조사

[정의]

19세기 전라도 여산부 태성리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가문의 호적 문서.

[개설]

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全羅道礪山府晋州姜氏戶籍文書)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에 해당하는 19세기 전라도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에 속하는 충청도 연산현 모촌면 신흥리에 거주하였던 진주강씨 집안에서 작성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이 호구단자는 첫째, 강순창(姜舜昌)-강주호(姜柱鎬)-강도일(姜道一)[강엽(姜燁)], 강번(姜蕃)-강도보(姜道輔), 둘째, 강순창-강주원(姜柱元), 셋째, 강순창-강주한(姜柱漢)[강이한(姜履漢)]-강추(姜萑), 강훈(姜薰)-강도명(姜道明), 강도보(姜道輔)로 연결되는 가문의 계통을 보여 주는 문서로서, 강순창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까지의 거주지와 가족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는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와 연산현 모촌면 신흥리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집안은 19세기 초부터 19세기 후반까지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면서, 호구별 상황을 기록한 두 통의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이전의 호적과 비교하여 내용을 정정하고 나서, 한 통은 관에서 보관하고 다른 한 통은 백성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여산부 태산리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집안에서 호구단자를 보관하게 된 것이다.

[형태]

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는 총 42점의 호구단자이다. 각각의 문서마다 한자로 내용이 적혀 있으며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구성/내용]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에 거주하던 진주강씨의 호적문서이다. 도합 42건이다.

첫째, 강순창-강주호-강도일[강엽], 강번-강도보로 연결되는 호구단자이다. 먼저, 강순창의 호구단자는 1807년에 작성되었다. 당시 강순창은 1807년 당시 전라도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에 거주하였고, 직역(職域)은 유학이며 며느리 파평윤씨(坡平尹氏)와 서자 두승(斗升)이 함께 살고 있었다. 노비는 도망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1810년과 1813년에 작성된 강주호의 아내인 과부 파평윤씨의 호구단자인데, 파평윤씨는 1807년 시아버지 강순창 집에 있다가 나중에 강도일 또는 강엽으로 개명하는 아들 강흥갑(姜興甲)이 성장하자 1810년 강순창으로부터 분가하였다. 1810년 당시 파평윤씨의 나이는 마흔 살, 아들 강흥갑은 열네 살이었다. 강도일 또는 강엽의 호구단자는 1819년부터 작성되었다. 강도일의 호구단자에 의하면 1822년 무렵 강엽으로 개명하였다. 1819년 호구단자에 강도일은 강주호의 아들이며, 처는 두 살 연상인 고성박씨(固城朴氏), 어머니 파평윤씨는 마흔아홉 살이었다. 1822년, 1828년, 1834년, 1837년, 1840년, 1843년, 1846년의 호구단자도 남아 있는데, 강엽의 직역은 유학이며, 부인 고성박씨는 1846년 호구단자부터 나타나지 않는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맨 마지막으로는 1879년 연산현에 제출된 강도보의 호구단자이다. 1876년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강도보는 직역이 유학이며, 서른여덟 살로, 충청도 연산현 모촌면 신흥리에 거주하였다. 그는 한 살 아래의 처 장기정씨(長耆鄭氏)와 함께 살고 있었고, 노비는 한 명이었다.

둘째, 강순창-강주원으로 연결되는 호구단자이다. 강주원의 호구단자는 1810년 작성되었으며, 당시 강주원의 직역은 유학, 거주지는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였다. 그는 두 살 연상의 처 진주소씨(晉州蘇氏)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셋째, 강순창-강주한-강추, 강훈-강도명으로 연결되는 호구단자이다. 뒤에 강이한으로 개명한 강주한의 호구단자는 1807년, 1810년, 1816년까지는 강주한으로, 1822년, 1827년, 1831년, 1834년, 1837년, 1840년, 1843년, 1846년, 1852년, 1858년, 1861년, 1864년, 1867년의 호구단자에는 강이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주한은 부친 강순창과 마찬가지로 직역이 유학이며, 여산 천동면 덕곡리에 거주하였다. 1807년에는 동갑내기인 고흥유씨(高興柳氏)와 둘이 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810년과 1816년 문서에는 아들 강흥복(姜興福)이 각각 여덟 살, 열네 살로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22년에는 강이한으로 개명하였는데, 처 고흥유씨, 큰아들 강흥복[강신(姜莘)으로 개명]과 며느리 풍양조씨(豊穰趙氏), 작은아들 강흥문(姜興文)과 함께 거주하였다. 1827년에는 작은아들 강훈(姜薰)[강흥문에서 개명]이 결혼하여 며느리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후 1831년, 1834년, 1837년, 1840년, 1843년, 1846년, 1852년까지 3년 주기로 호구단자가 작성되었다.

그런데 강이한의 호구단자는 1858년부터는 충청도 연산현으로 거주지가 바뀌어 기록된다. 즉 강이한은 당시 일흔다섯 살의 홀아비였으며, 둘째 아들 강훈과 둘째 며느리 전주이씨, 스물여섯 살 된 손자 강도명과 손자며느리 은진송씨(恩津宋氏) 등과 함께 모두 충청도 연산현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무렵 강이한의 형을 포함하여 친족들이 대거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1년, 1864년, 1867년의 호구단자가 남아 있는데, 1864년부터는 아들과 며느리가 없고, 손자 강도명과 손자며느리 은진송씨 등 세 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강훈의 호구단자는 1843년, 1846년, 1849년에 작성되었다. 강훈은 강이한의 아들로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에 거주하였고 동갑인 처 전주이씨와 아들 강도형(姜道亨), 며느리 전주최씨(全州崔氏) 등과 함께 거주하였다. 강추의 호구단자는 1846년에 작성되었다. 강추는 강이한의 아들로, 강이주(姜履周)에게 양자로 갔다. 직역은 유학,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며 거주지는 여산부 천동면 덕곡리이다. 쉰세 살 된 양어머니 은진송씨(恩津宋氏)를 모시고 스물여덟 살 된 처 전주이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노비는 한 명이었다.

넷째, 강도명[나중에 강찬주(姜贊周)로 개명]의 호구단자이다. 1872년 연산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에 따르면 직역은 유학, 나이는 마흔한 살로, 예순여덟 살인 어머니 전주이씨와 한 살 연상인 처 은진송씨가 함께 거주하였고, 솔거노비는 두 명이었다. 이후 1876년과 1879년, 1882년, 1885년에도 호구단자가 작성되었다. 1882년부터는 개명된 강찬주의 호구단자로 작성되었다. 1882년에는 어머니 전주이씨와 처 은진송씨 외에도 열여덟 살 된 아들 강문선(姜文善)과 스물한 살 된 며느리 제주고씨(濟州高氏)가 함께 살고 있다.

그 밖에도 강순창의 후손이 아닌 강순희(姜舜熙)의 손자 강욱(姜薁)의 호구단자 한 점이 있다. 강욱의 호구단자는 1873년 연산현 모면[모촌면] 신흥리에서 작성한 것인데, 당시 홀아비였던 강욱은 아들 강도정(姜道政)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강순창의 후손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촌수이기 때문에 함께 호구단자를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라도 여산부 진주강씨 호적문서는 19세기 익산 지역의 가족관계와 이동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한국학자료센터(http://kostm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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