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수 사직 봉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1421
한자 益山郡守辭職封事
영어공식명칭 Iksan Gunsu Sajik Bongsa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세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36년 - 정인홍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586년 - 「익산군수 사직 봉사」 저술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23년 - 정인홍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911년 - 「익산군수 사직 봉사」 『내암집』 2권 ‘봉사(封事)’에 수록
배경 지역 익산시 - 전라북도 익산시
성격 문장
작가 정인홍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정인홍이 1586년 익산군수직에 대한 사직을 청하며 임금에게 올린 글.

[개설]

「익산군수 사직 봉사(益山郡守辭職封事)」는 정인홍(鄭仁弘)[1536~1623]이 1586년(선조 19) 10월 12일에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자, 임금에게 군수직의 사직을 청하며 올린 글이다.

정인홍의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며, 문집으로 『내암집(來庵集)』이 있다. 정인홍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수제자로서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경상도 지역에서 큰 활약을 한 의병장이기도 하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 때에 영의정까지 오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황(李滉)·이언적(李彦迪) 등을 비방하는 소(疏)를 올려 전국 유생들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계축옥사(癸丑獄事)[1613]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참수되었다. 「익산군수 사직 봉사」는 제수된 익산군수직에 대한 사직을 요청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관료 사회의 정치적 폐단을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구성]

「익산군수 사직 봉사」는 정인홍의 문집인 『내암집』 2권 ‘봉사(封事)’에 수록되어 있다. ‘봉사’는 왕에게 밀봉하여 올리는 글을 말한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익산군수직을 수행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유를 밝히고 있다. 후반부는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불합리한 행실을 하는 정치 세태를 비판하고, 올바른 국정 수행을 위하여 강학에 힘쓸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내용]

정인홍의 사직 봉사는 익산군수직을 제수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시작하여, 사직을 청할 수밖에 없는 네 가지 이유가 이어진다. 모친과 부친의 상을 연이어 치른 후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서 막중한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학문과 행실이 관직을 제수받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동료들의 논박을 받아 향촌으로 내려간 이후 공직에 참여하지 못한 기간이 길어졌다는 점이 세 번째 이유다. 네 번째는 자신의 등용으로 인하여 임금의 인사 의도가 의심받을 수 있고, 인재 운용에 제약이 따를 수 있으므로 사직을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와 백성을 위하기보다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처세하는 당시의 정치적 폐단에 대한 강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임금에 대한 권면의 내용이다. 시류를 바로잡아 국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시비(是非)의 명백한 구분이 필요하므로, 임금은 학문에 더욱 매진함으로써 바른 안목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인홍의 사직을 청원한 이유와 당시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통하여 당쟁이 본격화되기 이전 조선의 정치적 지형과 긴장감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 『내암집(來庵集)』
  •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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