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991 |
---|---|
한자 | 徐居正 |
영어음역 | Seo Geo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도식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의 증손으로,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생애]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으며, 1451년(문종 1)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왔으며,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1457년 문과중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하여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을 만나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하여 문형(文衡)을 관장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을 관장하였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하여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수창(酬唱)을 잘하여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같은 해에 우찬성에 올랐다. 1477년에는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1487년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하였으며,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館試), 한성시(漢城試), 향시(鄕試)에서 7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였다. 1485년에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여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세종에서 성종까지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으며, 23년간 문형을 관장하였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중용하였다.
[학문과 사상]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웠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웠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서문에서는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고, 기자(箕子)가 이어받은 이래 삼국과 고려시대에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음을 자부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내세우고 있다.
[저술]
특히 시(詩)에 능하여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있다. 개인 저술로 『역대연표』,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다.
[작품]
1477년(성종 8)에 부사 이신효(李愼孝)가 예전에 강릉관아 앞에 있던 운금루를 동북쪽 모퉁이에 옮겨 세웠는데, 서거정이 「운금루기(雲錦樓記)」를 지었다. 기문의 내용은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내 들으니 누의 높이가 공중에 우뚝 솟아 풍우도 아랑곳없고 누의 크기는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부상(扶桑)을 휘어잡고, 양곡(暘谷)을 당길 듯하다. 풍악산이 등에 있고, 오대산이 겨드랑이에 있다. 바다 위 여러 봉우리는 푸르게 뾰족뾰족, 옹기종기 연하 아득한 사이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털이나 실같이 보인다. 아침햇볕과 저녁노을이 사시로 바뀌는 것과 온갖 경물(景物)이 변하는 천 가지, 만 가지 형상은 한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오직 운금이란 이름으로 현판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일찍이 소자첨(蘇子瞻)의 연꽃 시를 보니 "하늘 베틀에 구름같은 비단"이라는 말이 있으니, 내 상상하건대 아마 여기에서 취한 것이리라.’ 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핵심적인 학자의 한 사람으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