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757 |
---|---|
한자 | 愚伏祠 |
영어음역 | Uboksa Shrine |
이칭/별칭 | 퇴곡서원(退谷書院),도동사(道東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호민 |
성격 | 사우 |
---|---|
건립시기/일시 | 1823년(순조 23) |
관련인물 | 정경세 |
[정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사우.
[개설]
정경세의 호를 따서 우복사(愚伏祠)라고 하였고, 일명 도동사(道東祠) 또는 퇴곡서원(退谷書院)이라고도 한다.
[건립경위]
정경세는 1613년(광해군 5) 강릉대도호부사에 부임한 후 양몽재(養蒙齋)를 설치하고 강릉향교에 흥학비(興學碑)를 세우고 3년 재임 기간 동안 교화를 크게 행하였다. 또 강릉부의 혼인 습속 즉 동성동본의 통혼 금지, 상례 절차의 무례함, 상례시 비용의 과다 지출 등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통유문과 절목을 작성하여 부민(府民)을 비롯한 사족(士族)들이 지키도록 하였다. 이후 향인들이 그 덕에 보답코자 제사를 봉행할 뜻이 있었으나 미처 달성하지 못하다가 1822년(순조 22)에 오봉서원(五峰書院) 원장(院長) 김동윤(金東潤)과 향인들이 흥학비를 새로 세우고 또 묘우를 세워 다례를 봉행함으로써 그의 행적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이해 10월에 읍내 사림들이 노래곡(老萊谷)[현재 내곡동] 최재식(崔在植) 집에 모여서 회합을 갖고 삼학궁(三學宮)에 사우 건립에 관한 통문을 돌렸다. 이듬해에는 초당리(草堂里)에 사는 유병년(柳秉年)의 집에 모여서 재차 사우 건립을 논의한 후 다시 옥가리(玉街里)[현재 강릉시 옥천동]와 신리(新里)[현재 강릉시 주문진읍]에서 회합한 후 사우터를 연곡면 퇴곡리로 정하였다.
그러나 1823년(순조 23)에 도동사 건립을 주도하였던 정환민(鄭煥敏), 박돈검(朴敦儉), 신석필(辛錫珌) 등은 강릉향교 유회에 참석하면서 단자를 제출하였는데,우복의 치세에 대해 교화가 점차 나타나고 학정(學政)은 날로 새로워졌다. 어리석은 풍속은 사라지니 진실로 강릉을 재조한 은덕이 있다라고 하면서 사우 건립에는 찬성하지만, 퇴곡 땅은 길이 좁고 읍치에서 멀다는 이유로 관음(觀音)[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풍호(楓湖)[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 대관정(大觀亭)[강릉시 운곡리에 있으며, 부장(部將) 고덕성(高德誠)이 지은 정자] 중 한 곳으로의 이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강릉부사였던 유원명(柳源鳴)과 향중 사족들은 김원옥(金源玉)을 장의로 선정하고 심지간(沈志簡), 최광교(崔匡敎), 최수형(崔守衡), 김계풍(金啓灃) 등 4명을 차지(次知)로 임명하고 사우 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읍 근처의 땅은 조각 땅이고 목재가 멀리 떨어져 있고, 퇴곡은 목재와 돌들이 집 앞에 있으니 터와 재목의 양을 헤아려서 이곳에 배치하면 공이 반으로 줄어드니 편리하고 적합하지 않은가.”라고 하고 사우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해 겨울인 10월 정묘일에 터를 팠으나 날씨가 너무 추워 중지하고 이듬해인 1824년(갑신년) 3월 병자일에 입주상량하였다. 권성태(權星台), 설악산(雪嶽山) 산승(山僧) 성찬(性贊), 최한현(崔翰鉉), 김찬규(金纘圭) 등이 모두 협력하였다. 김원상(金源商), 최병현(崔秉鉉)을 영남 본댁에 보내 통문을 각 서원과 각 문중에 돌려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해에 유원명(柳遠鳴) 강릉부사가 해임되고 홍희필(洪羲弼)이 부임하였는데 묘우는 이미 10월 초4일 계해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지역 내 생원진사와 모든 유생들이 많이 모임으로써 두달 동안 쌀을 모아서 다례 비용으로 삼고 동년 동월 계정일(季丁日)에 봉안하였다.
[현황]
우복사는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