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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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喆淵 |
영어음역 | Yi Cheolyeon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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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천주교 신부 |
출신지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일장리 525-7 |
성별 | 남 |
생년 | 1892년 7월 2일 |
몰년 | 1980년 4월 5일 |
대표경력 | 금광리 본당 설립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금광리 본당의 첫 신부.
[학력]
1905년 서울 원전 천주교 예과에 입학, 1911년 본과에 재학하였다.
[경력]
1921년 6월 12일에 사제서품을 받은 뒤 1921년 금광리 본당, 1923년 주문진 본당, 1928년 용소막 본당에 부임하였다. 1936년 옥천, 1942년 안성, 1943년 연암, 1944년 익산 등에서 지내다가 1962년 7월 9일에 은퇴하고 1980년 4월 5일에 선종하였다.
[활동사항]
1921년 12월 2일 금광리 본당에 부임하여 호세문제와 포교계 제출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22년과 1923년에 교구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교리학교는 남녀를 합하여 1922년에 46명, 1923년에 39명이었으며 소학교 학생 수는 1922년에 18명, 1923년에 24명이었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 적당하지 않은데다 발전 가능성도 적어 1923년 11월 23일 주문진 본당으로 이전하였다. 1924년에는 주문진에 8,000평에 달하는 토지를 1,266원에 매입하여 성당 부지를 마련하는 한편 강릉군에 7개소, 양양군에 2개소, 평창군에 16개소, 정선군에 3개소, 영월군에 3개소 도합 5개 군에 30여 개소에 흩어져 있는 교우를 관할하였다. 1924년과 1925년에 평창군 읍상리 신자들이 소속 본당주임인 용소막의 시잘레(Chizallet)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잘레 신부와 드브레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성사를 받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5년부터는 전교 활성화를 위해 유급 전교회장(傳敎會長)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드브레 주교에게 도와주도록 요청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