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20
한자 時代-感性-圓光大學校博物館
영어공식명칭 Capture the emotions of the times-Wonkwang University Museum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신동 27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다운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 원광대학교 내에 있는 제1종 종합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

[개설]

백제의 고도 익산에 있는 종합 박물관인 원광대학교 박물관은 2,000여 년의 익산과 호남 문화를 압축하고 있는 저장고이다. 그 저장고 속에는 유물을 만들어 사용하고 전승해 온 시대의 감성이 담겨 있다.

1968년 1월 도서관[지금의 원광보건대학교 별관] 한 층을 빌려 전시실로 ‘원광대학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후 1972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원광대학교 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74년 3월 신축한 미술관으로 확장 이전하였다가 1987년 6월 단독 건물을 신축해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박물관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안에 담기는 역사와 전통도 점점 확대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12만 3000여 점의 유물을 구입 또는 기증 받았다. 그중 3,300여 점의 명품을 선정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0년 제1종 종합박물관으로 등록된 원광대학교 박물관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90호 「대곡사명 감로왕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건륭15년명 감로탱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고종황제 어진」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은 백제 시대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60회 이상 발굴 또는 조사하여 호남 지역의 역사, 나아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앞장서서 규명하였다. 또한 20회 이상의 특별전, 20회 이상의 역사 문화 강좌, 60회 이상의 국내외 역사 문화 답사 그리고 전통문화 교육과 학술 자료를 발간하였다.

반세기 동안 지역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한 원광대학교 박물관원광대학교 학생은 물론 지역민과 함께하는 명실상부한 지역거점대학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학박물관]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6,076㎡ 규모의 단독 건물이다. 1층에 옹기전시실, 2층에 선사·백제실, 통일신라·고려도자실, 조선도자실, 3층에 생활민속실, 무속실, 4층에 서화, 기증 유물실, 불교미술실, 한수실 등 총 10개의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 외 유물은 7개의 수장고에 유형별로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또한 박물관 주변은 고인돌과 석탑 등 석조물을 전시하는 야외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교직원과 학생을 제외한 외부 관람객 수는 한 해 3만여 명에 달한다.

[진품 명품]

대곡사명 감로왕도(大谷寺銘 甘露王圖)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지정문화재로 2018년 6월 27일 보물 제1990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지정 이전의 명칭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건륭29년명감로도」였다. 대곡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비봉산에 있는 조계종 사찰이다.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본래 대곡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기(畵記)를 통하여 밝혀졌다. 가로 278㎝·세로 218.3㎝ 크기의 비단에 그려진 대형 감로왕도이며 화기에 의하면 건륭 29년(1764, 영조 40) 40여 명이 시주하고 13명의 불화승(佛畵僧)이 참여하여 그렸다고 전한다. 건륭은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 고종 때의 연호이다.

감로왕도는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 의식을 그린 불화로 감로도(甘露圖), 감로탱화(甘露幀畵), 감로탱(甘露幀)이라고도 한다. 상중하 3단 구도로 그려진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정교한 필치로 장엄한 화격(畵格)을 보여 주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특히 하단에는 참혹한 전쟁의 모습과 함께 평화롭게 농사짓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였다.

봉안되었던 사찰, 제작 연대, 제작에 참여한 불화승, 시주자 이름 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18세기 불화 연구의 기준작으로 평가받고 있어 역사적, 회화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

건륭15년명 감로탱화(乾隆十五年銘甘露幀畵)

「대곡사명 감로왕도」와 대체적으로 유사한 상중하 3단의 안정감 있는 구도로 그려진 감로탱화이며,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가로 185.5㎝·세로 176.5㎝ 크기의 모시 바탕에 섬세하고 대담한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 특히 하단의 인물마다 그 동작을 옅은 먹으로 그림자처럼 따라 그려 망령을 표현한 기법은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러한 망령은 이후의 감로탱화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감로탱화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건륭15년(1750, 영조 26)에 24명이 시주하고 승려 16명이 조성에 참여하였다. 봉안처는 알 수 없지만 박락이 거의 없고 채색이 선명하며 제작 연대, 불화승, 시주자 등을 확실히 알 수 있는 18세기 중엽의 대표적 수작이다.

고종황제 어진(高宗皇帝御眞)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20세기 초에 그린 고종황제[1852~1919] 어진이다. 종2품관까지 지낸 채용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초상화가로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 「황현 초상」[보물 제1494호], 「최익현 초상」[보물 제1510호]을 그렸다.

「고종황제 어진」채용신이 그린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인 소장본도 있고, 작가 미상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그리고 네덜란드의 휴벗 보스(Hubert Vos)가 유화로 그린 개인 소장본도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어진은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2013년 5월 20일 지정]이 유일하다.

가로 70㎝·세로 137㎝ 크기의 비단에 그려진 어진의 뒷배경은 왕의 존엄과 권위, 그리고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이다. 어진의 배경으로 일월오봉도를 그린 유일한 사례이며, 초상화에 배경을 잘 그리지 않는 채용신의 보기 드문 작품으로 희귀성이 있다. 어진 속의 고종황제의 모습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입체감을 살린 익선관에 황색 곤룡포를 입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렸으나 오른손은 홀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무릎 사이에 늘어뜨린 호패에는 ‘임자생 갑자원년등국(壬子生甲子元年登國)’, 용안 오른쪽에는 붉은색 바탕에 ‘광무황제사십구세어용(光武皇帝四十九歲御容)’이라 쓰여 있다. 전자는 임자년[1852]에 태어나 갑자원년[음력 1863]에 조선 제26대 왕에 즉위하였다는 기록이고 후자는 이 어진이 1900년 49세 때의 모습이라는 기록이다.

선원전에 모셨던 조선 시대 왕들의 어진은 6·25전쟁 때 모두 부산으로 옮겨 보관하였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따라서 「고종황제 어진」은 몇 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어진 중 하나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에는 채용신 작품으로 「고종황제 어진」 외에 「박해창 초상화」 2점, 「호운거사 초상화」 1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기증 받은 천상의 컬렉션]

〈남강 김태곤 기증유물〉

남강 김태곤[1937~1996]은 1971~1978년 원광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민속학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무속 연구의 교과서라 평가 받는 『한국무가집』과 『한국무속연구』를 집필하였다. 특히 민속학연구소는 국내 최초의 민속 관련 연구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원광대학교 재직 중 수많은 무속인을 만나 조사하면서 모은 귀중한 무속 자료 562건을 1978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중 해주 만신 유순덕의 「무신도」, 서울 부군집 박승민의 「무신도」는 우리나라 무속 연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가치 있는 자료이다. 원광대학교 박물관 3층 무속실은 남강 김태곤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속실은 여타 박물관에서 찾아보기 힘든 원광대학교만의 특징이자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청송 고형곤 기증유물〉

청송 고형곤[1906~2004]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교수, 전북대학교 총장, 제6대 국회의원, 학술원 종신회원 등을 역임한 철학자이자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참고로 제22대 서울특별시시장과 제30대, 제35대 국무총리를 지낸 고건의 부친이기도 하다.

철학자로서 평소 유교·불교·도교와 관련된 시(詩)·서(書)·화(畵)를 애호하였고 평생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던 유물과 자료 777점을 2001년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 이유는 원불교가 설립한 대학박물관으로서 정신적 문화유산에 대한 유물 수집과 전시, 보존이 뛰어나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기증 유물에는 추사 김정희 간찰, 다산 정약용 간찰, 몽와 김창집 간찰, 도암 이재 간찰, 소치 허련 병풍, 백자항아리, 백자 청화 화로 등 귀중한 유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인산 박순호 기증유물〉

인산 박순호[1942~ ]는 원광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등을 역임한 후 2008년 정년 퇴임한 우리나라 민속학과 구비문학의 대가이다. 평소 전라북도의 문화유산에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갖고 연구와 수집을 병행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격동기에 소외되어 빛을 보지 못한 전라북도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그 가치와 위상을 드높였다. 이렇게 평생 수집하여 애장하던 염재 송태회, 효산 이광렬, 소재 이상길, 보정 김정회의 작품을 포함한 77점 422폭의 서화를 2011년 30여 년을 몸담아 온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하였다.

[박물관 이야기]

〈잘한 일, 잘못한 일-을사5적 이완용의 관 뚜껑〉

1979년 2월 24일 원광대학교 박물관익산시 낭산면에 사는 유종식으로부터 널빤지 하나를 4만 원에 구입하였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에 200원이었으니 이는 필시 보통 널빤지는 아니었을 터다.

널빤지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 우봉 이공지구(朝鮮總督府中樞院副議長正二位大勳位侯爵牛峯李公之柩)’라는 긴 직함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한눈에 을사5적 이완용의 관 뚜껑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관이 우봉인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사망 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정2위에 추서되었으며, 대훈위국화대수장이라는 최고의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었다.

이완용은 생전에 조선 최고의 지관을 통하여 자신의 묏자리를 정해 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중턱이었다. 1926년 2월 11일 사망한 이완용의 시신은 2월 18일 선인봉 중턱에 묻혔다. 그러나 묘를 훼손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순사 한 명을 상시 배치까지 하며 묘를 지켜야만 할 지경에 이르렀다. 광복 후에는 이마저 중단되어 묘 훼손이 끊이지 않았다. 이완용이 사망한 다음날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을 1면에 실었는데 글 말미에 쓴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라는 내용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완용의 묘는 이완용이 죽은 후 53년 만에 완전히 파헤쳐져 사라지게 된다. 1979년 4월 말 증손자 이석형 등이 집안에 치욕만 남기고 있는 묘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고용해 폐묘한 것이다. 유골은 화장하여 마을 앞 장암천에 뿌려졌다. 관 뚜껑은 두께가 10㎝나 되어서 폐묘 때 고용된 마을 사람 유종식이 바둑판을 만들기 위하여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발 빠르게 구입한 것이다.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사학 원광대학교가 이 지역 익산에 있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을 구입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게 하는 교육 자료로서 이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박물관 수장품 대장에 1981년 5월 18일에 유족에게 양도하여 폐기 처분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후손들이 치욕의 역사를 지워 버리기 위하여 가져가 태워 버렸다고 전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유족들에게 관 뚜껑을 건네준 것은 참으로 잘못한 일이었다. 당시 박길진 총장을 설득하기 위하여 이완용 후손들과 함께 온 사람 중에는 한국역사계의 거장 이병도 박사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미 작고한 이병도 박사는 지금까지도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구설수에 자주 오르고 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완용과 본관이 같은 우봉이씨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가 보다.

〈400여 년 만의 귀환-심수관 향로〉

박물관 2층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비롯한 도자기류를 주로 전시하고 있다. 다른 유물에 비하여 다종 다량의 도자기류를 소장하고 있어 명품만을 선별하여 전시하여도 진열장이 부족하여 복도에도 진열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다. 자랑같이 들리겠지만, 최고의 명품임에도 전시실 공간이 부족하여 밖으로 쫓겨난 유물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중 단독 진열장에 전시하고 있는 향로 도자기 한 점이 눈에 띈다. 형태나 문양이 이국적이어서 우리나라 도자기와는 달라 보였다. 특히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겨 설명문을 보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제작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바로 심수관(沈壽官)이다.

심수관이 이러한 도자기를 만들게 된 이유와 역사는 400여 년 전 정유재란[1597~1598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의 화의 교섭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이때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이곳에서 도자기 생산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심당길(沈當吉)을 비롯한 여러 도공이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 현]로 끌려갔다. 남원성을 공격한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사쓰마의 영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는 하층민이었던 심당길은 사쓰마에서 사무라이라는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사쓰마도기[薩摩焼]를 개발하였고 어용(御用) 도자기까지 생산하는 도예 명문가를 이루었다.

향로의 제작자 심수관은 심당길의 14대 손이다. 심수관은 1988년 대한민국 명예총영사에 임명되었고, 1999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2001년 한일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원광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을 당시 송천은 원광대학교 총장에게 선물하였고, 이 작품이 다시 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유물이 아닌 작품이지만 400여 년간 지켜 내려온 조선 도공의 기술로 만든 도자기의 귀환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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