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30
한자 政治
영어공식명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현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고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활동.

[개설]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과 이익이 존재하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이는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갈등을 야기한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다. 현대의 정치는 주로 선거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정치는 국가 권력이 수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일컬으며, 넓게는 자신의 의사를 공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 익산 지역은 전형적인 농촌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철도가 부설되어 이리역이 개통되자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교통의 발전을 계기로 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일본인은 이리 지역의 가능성을 보고 몰려들었다. 당시 이리역을 중심으로 헐값에 땅을 사 모으고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한 구역을 만들고 각종 기관들을 설치하였다. 1931년 인구가 늘어나 이리는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7년에는 익산군에서 분리되어 이리시가 되었다.

[1945년 광복과 정부 수립 이후]

1945년 광복 후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본래의 목적 외에 정치와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복안이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혼란이 진정될 때까지 일본의 협력을 받았고 일본인 관리들이 행정 요직에 그대로 머물렀다. 익산 지역도 미군이 주둔하며 공식적으로 행정기구를 관리할 때까지 일본인 관리들이 자리를 지켰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은 철수를 서둘렀다. 익산에는 전북 각지에서 모여든 일본인들의 수가 많아졌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호선부대를 조직하였고, 자신들의 재산에 손을 댔다며 한국인을 미군정에 고소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5년 9월 11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간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익산 지역 책임자로는 존 스탄(John D. Starn) 소령과 후임으로 쇼로( 대위가 부임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미군정 법령 제17호 「국회의원 선거법」에 의거하여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이리시에서는 무소속 배헌이 당선되었으며, 익산군 갑구는 대동청년단의 배형남, 익산군 을구에는 이문원이 당선되었다. 당시 호남 지역이 한민당의 정치적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좌파 진보세력의 우세는 이례적이었다. 당시 익산은 농업 지역이었고 이리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인구 유입이 활발해 정치적 성향의 분포도 다양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법」 시행에 따라 이리시의회가 구성됨으로써 완전한 지방자치행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60년 4월 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부의 12년 통치가 끝났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을 앞세운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이 제정·공포되었다.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이 되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내각책임제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각제를 수용할 저력이 부족하여 원활히 운영되지 못하고 전례 없는 혼란을 겪다가 5·16군사정변을 초래하였다. 5·16쿠데타 세력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명암이 뚜렷한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익산시의 현대 정치도 그러한 국가적 기류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 붙여졌고 다수의 찬성을 받아 확정되었다. 이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창설되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대통령을 선거하는 주요 권한을 가졌다. 이리시는 4명, 익산군은 16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6월 30일,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임기가 만료되고 제2대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대통령을 간접선거하기 위한 제도라는 비판도 있지만 통일 정책과 정부의 의지 등을 국민에게 가깝게 전달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정치에 입문하고자 하는 많은 명망가들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출마하였다. 이리시와 익산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집권 시기에는 11대, 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전 선거에선 군산, 옥구, 이리, 익산 선거구를 통합하여 2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으나, 11대 선거부터 선거구 규모가 축소되며 이리, 익산 선거구에서 2인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17년 만에 소선거구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이때 이리시와 익산군의 선거구가 분리되었다. 한편,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 패권주의가 뚜렷하게 반영된 선거였다. 이리시 선거구는 중앙일보 기자, 김대중 당총재의 홍보비서로 일하였던 평화민주당 이협 후보가 당선되었고, 익산군 선거구는 평화민주당의 김득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익산시의 현대 정치사를 보면 다른 지방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치의 기류에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보면 전라북도 혹은 중앙 정치의 기류와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때때로 발생한다. 이는 익산시민이 대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여론을 표출할 충분한 저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지방자치의 확대]

대한민국의 지방자치제는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가 1991년에 다시 실시되었다. 지방자치제는 지방의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직접 행정기관장과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익산시는 1991년 1월 18일부터 본격적으로 지방의회를 구성하는 준비에 돌입하였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함에 따라 기초의원 선거와 광역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리시의회의 의원 정수는 총 22인이었으며 익산군의회 의원은 15인이었다. 지방자치제 부활은 주민들이 직접 지방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확대되고 주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 시작되었다는 의의를 가진다.

[1995년 익산시군통합 이후]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익산시로 통합되었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며 의회와 행정이 통합되었다. 종전의 임기 중이었던 이리시의회 의원과 익산군의회 의원은 익산시의회 의원으로 의원직을 승계하고 잔여 임기까지 재직하였다. 익산시의회의 최초 임시회는 1995년 5월 10일에 개최되어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는 투표를 진행하였다. 3차 투표까지 진행한 결과 황한규 의원이 의장에, 유승태 의원이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선거구도 통합되어 익산시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갑과 을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중간에 한 번의 통합을 제외하고 2019년 현재까지 그 구도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익산군과 이리시 공무원들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주민 홍보에 노력을 기울였고, 1차와 2차 추진에서 실패한 뒤 3차 의견 조사에서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이리·익산 통합에 따른 선행조건을 홍보하고 주민들을 설득하는 과정들이었다. 이리·익산 통합에 따른 선행조건이란 향후 익산 지역 발전 계획을 의미한다. 익산 지역 발전 계획에는 권역별 개발, 기능별 개발, 공업단지 조성, 주요 시설 유치 등 구체적인 정책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2019년의 관점에서도 해당 계획들의 큰 틀에서 익산시가 성장해 왔다는 점에서 당시 익산시 통합 출범은 익산 지역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익산시사』(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익산시청(http://www.iksan.go.kr)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http://info.nec.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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