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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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乾馬國 |
영어공식명칭 | Geonmag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있었던 삼한시대 마한의 소국.
[개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오늘날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이라는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한은 54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하나로 ‘건마국’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건마’와 익산시 금마면의 ‘금마’가 서로 발음이 비슷한 점과, 익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나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의 출토 양상을 근거로 건마국이 익산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건마국의 세력 범위는 금마면·왕궁면·팔봉면·삼기면 일대를 포괄하는 일정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 문화]
익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청동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금마면 용화산 서쪽 기슭 출토 비파형동검, 미륵산 출토 중국식 동검인 도씨검, 오금산 출토 청동거울, 함열 다송리 출토 청동 유물, 익산시 용제동 출토 청동 유물, 왕궁면 평장리 출토 청동 유물, 삼기면 오룡리 출토 청동 유물 등이 있고, 춘포면 신동리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함께 쇠도끼, 쇠끌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익산은 한강 이남에서 철기 문화의 유입을 알려 주는 주요 유적들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유적들은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넓은 평야지대에 밀집되어 있으며, 익산 이외에도 완주나 전주 지역까지도 포괄한다. 대부분 분묘 유적이다. 이 지역의 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 무기류와 청동거울과 같은 의기류, 청동끌 등의 공구류, 쇠도끼나 쇠끌, 쇠낫 등의 농공구류와 함께 토기로는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가 부장되어 있다. 각 유적 사이의 규모를 비교해 보면 동일 집단 내에는 커다란 위계차가 보이지 않지만 집단 사이의 위계차는 확인되며, 특히 출토 유물에서는 그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익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 청동 유물이나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 상대적으로 많이 출토되는 현상과 관련하여, 김원용은 익산을 중심으로 반경 60㎞ 이내의 지역에 대하여 ‘익산 청동기 문화권’이라는 개념을 설정한 바 있다. 김원용은 금강과 만경강 일대가 마한의 중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였으며, 익산 지역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마한 사람으로 발전하는 이 지역의 선주민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익산이 청동기문화의 중심 권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북서쪽의 금강과 남동쪽의 만경강을 통한 수로교통의 발달과 저평한 구릉과 곡저지가 발달하여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청동유물과 함께 철기유물이 함께 발견되는 현상에 관하여 한반도 서북한 지역의 정치적 파동과 관련된 주민 이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고조선 준왕의 남천(南遷)과 관련될 가능성이 계속 지적되었다. 이와 더불어 완주 갈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유물과 철기 유물, 절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의 발견으로 익산 지역에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서 새로운 문화가 이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익산의 주구묘와 분구묘]
한편 서북한 지역에서 익산으로 이주한 세력들은 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일정 기간 주도권을 장악하였지만 점차 토착 세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거나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 전후부터 3세기에 걸쳐 마한 전기의 중심 묘제로 주구묘(周溝墓)가 등장한다. 주구묘는 매장 주체부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굴착한 형태의 분묘를 가리킨다. 익산의 마한 초기 단계의 널무덤이 점차 널 주변에 도랑이 돌아가는 주구묘로 전환되었는데, 다시 주구묘는 수평적, 수직적인 확장을 거쳐 점차 대형 분구묘(墳丘墓)로 변화한다.
분구묘는 미리 흙이나 돌로 봉분과 같은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 양식을 가리키며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묘제로 사용되었다. 분구묘들은 군집 양상을 이루며 분포하는데, 금강 하구 일대에서는 3세기·4세기 단계에는 사라지지만, 내륙에 해당하는 미륵산 일대의 금마 일원이나 완주·전주 지역에서는 백제 영역화 이후인 5세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가 축조된다. 익산이나 완주 지역에서 영산강 유역과 유사한 형태의 대형 분구묘가 지속되고 발달하는 현상은 영산강 유역과 마찬가지로 마한의 전통이 강고하였기 때문으로 설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