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72
한자 後百濟
영어공식명칭 Hubaekj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집필자 권익산

[정의]

900년에서 936년까지 후백제 시기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의 역사.

[개설]

익산은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에 속한 지역으로 백제 부흥의 상징적인 곳이었으며, 후백제 멸망 시기 고려군이 진격한 최전방 마성(馬城)이 있던 곳이다. 또한 견훤은 후백제의 상징으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을 조성하였다.

[후백제의 도읍지 완산과 익산의 관계]

신라 말 사회가 혼란한 시기 서남해로 진출하여 세력을 키운 견훤은 900년 도읍을 전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정하여 정식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때 견훤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백제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견훤 편에 따르면, 견훤은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 명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백제의 뿌리로 금마를 언급하고, 백제를 계승하여 후백제를 세웠음을 강조하였다.

[고려군의 마지막 추격지 마성(馬城)]

930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후백제는 왕위 계승 다툼으로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하면서 급격히 기울었다. 936년 왕건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하여 후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전투가 일리천[구미]에서 벌어졌다. 일리천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고려군이 황산[논산]까지 추격하여 탄령을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후백제를 압박하자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37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고려군이 신검을 쫓아 마지막으로 주둔한 마성이 바로 익산 지역으로 미륵산성 또는 왕궁평성으로 추정된다. 익산과 전주 사이는 평야지대로 이렇다 할 방어 시설이 없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신검이 항복한 것이다.

[왕궁리 유적과 후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은 백제 말기 궁성으로 조성되었다가 백제 멸망 직후 보덕국(報德國) 시기에는 궁성과 사찰이 함께 운영되었다. 보덕국이 소멸한 이후로는 통일신라 내내 사찰로 운영되었다고 보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과 관련해서는 완산은 개가 웅크린 형세와 같은데 도선이 여기에 탑을 세움으로써 개꼬리를 진압하여 왕건이 견훤을 이기게 하려 하였다는 전승이 있으나 이는 후대에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제작 연대를 연구한 결과 후백제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한 주체는 견훤으로 보고 있다.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씻기 위해 나라 이름을 ‘후백제’로 정하고 전주에 도읍하였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며, 922년 미륵사 탑을 개탑하여 백제의 계승과 부흥 의지를 드러냈다. 견훤은 백제의 상징인 미륵사가 있는 익산에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하여 후백제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당시 익산 지역에 전해지고 있던 백제의 공예 기술과 석공 기술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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