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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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兩班 |
영어공식명칭 | Yangban, |
이칭/별칭 |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사류(士類),사림(士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조선 시대 전라도 익산 지역의 지배계층.
[개설]
양반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지배층을 통칭하는 용어였으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양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였다. 처음에는 문반(文班)인 동반(東班)과 무반(武班)인 서반(西班)을 지칭하였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점차 지배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오면서부터 양반은 지배층을 의미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의 양반은 사대부(士大夫), 사족(士族), 사류(士類), 사림(士林)이라고도 불렀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와 사림이 있었다. 사림은 ‘사대부지림(士大夫之林)’의 준말로서 사대부군(士大夫群)을 뜻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보다 사림이, 사림보다 사류가, 사류보다 사족이 더 넓은 범위의 양반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양반은 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법적으로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양반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마련된 적은 없다. 남이 인정해 주어야만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 조상 가운데 유명한 인물, 즉 현조(顯祖)가 있어야 하였다. 현조란 학문적으로 뛰어나거나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웠거나 혹은 높은 관직을 지낸 자를 지칭한다. 현조가 어떤 인물이었느냐가 양반의 등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접빈객(接賓客)이나 봉제사(奉祭祀)와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체통은 물론이요, 마음의 수양이나 학문 활동에서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거나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또 결혼을 하는 데 있어 상대방의 가격(家格)을 따지는 것도 양반 지위의 유지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흔히 조선의 양반을 국반(國班), 도반(道班), 향반(鄕班), 잔반(殘班)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통혼권(通婚圈)을 염두에 둔 구분인데, 국반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양반, 도반은 도 내에서, 향반은 향촌사회 내에서 알아주는 양반을 지칭한다. 그리고 잔반은 몰락 양반을 의미하는 말이다.
[『금마지(金馬志)』에 나타난 조선 후기 익산의 양반]
익산 지역에서 활동한 양반들의 생활 모습은 1754년(영조 35)부터 약 5년 간 익산군수로 재직하였던 남태보(南泰普)[1694~1773]의 『금마지(金馬志)』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금마지』에 따르면, 익산은 “사회 기강이 매우 엄격하여 양반과 평민 사이에 구분이 분명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사족(士族)의 규모가 매우 컸는데, 사족이란 문무 양반 및 그 혈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당시 익산군으로 모여든 양반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본래부터 여기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는 토박이 양반이건 중간에 외지에서 들어온 객반(客班)이건 한결같이 다 가세(家勢)가 쇠락하여 가위 빌어먹다시피 하고 있으며, 그 가난하고 처량한 모습이 오히려 일반 백성보다 심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들을 가리켜 ‘겸노상전(兼奴上典)’이라고 불렀는데, 종을 부려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종이 해야 할 일까지 겸하여 한다는 뜻이다. 남태보는 이들의 모습을 “대체로 가난하여 머슴 하나도 두지 못하며 따라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도 몸소 하기 나름이다. 이들이 사는 집도 돼지우리나 진배없다. 가운데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의지하여 동그랗게 돌아가며 서까래를 놓고 그 위에 풀을 덮어 만든 움막 같은 집이다.”라고 묘사하였다.
이처럼 익산군에 몰려든 양반들의 행태는 지역으로서도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다. 남태보는 『금마지』에서 “그들은 세금과 환자(還子)의 기한을 넘기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양반으로서의 위세는 대단하여 그들의 등살 때문에 마을에서 감히 이정직(里正職)을 감당한 상민이 없다. 따라서 세금이나 환자를 독촉할 때면 으레 군(郡)에서 직접 이속(吏屬)이 나가는데 그 이속들이 양반들이 살고 있는 움막 앞에 가서 세금이나 환자를 독촉하면, 양반은 큰 소리로 ‘내실(內室)이 바로 앞에 있거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썩 물러가라.’ 하고 외쳐 쫓아 버렸다.”라고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사족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호적에 실린 4,000호 중 양반 가구가 1,500여 호나 된다.”라고 밝혔다.
[의의와 평가]
남태보의 『금마지』는 조선 후기, 신분제가 무너지던 시절의 양반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분제가 엄격히 지켜지던 익산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기록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