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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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豆川祠 |
영어공식명칭 | Ducheonsa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은기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봉곤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은기동에 있는 조선후기의 사당.
[개설]
두천사(豆川祠)는 1780년(정조 4) 전라도 익산군 팔봉면 은기리의 철원최씨들이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폐되었다가 1900년 다시 영당을 짓고 향사를 지냈다. 1962년에 영정 대신 위패를 모시고 사당의 이름을 ‘두천사’라고 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철원최씨 문중의 가묘였지만, 이후 최영 장군의 충성과 위덕을 온 국민들이 함께 기려야 한다는 지방 유림들의 뜻에 따라 지방 서원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정면 주향에는 ‘무민공 기봉 최선생(武愍公奇峯崔先生)’, 즉 최영 장군의 신위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로는 ‘첨정공 최선생(僉正公 崔先生)’과 ‘봉사공 최선생(奉仕公公崔先生)’이 배향되어 있다.
최영(崔瑩)[1316~1388]은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크게 무찌른 고려의 명장이다. 1388년 문하시중이 된 후 염흥방과 임견미 일당을 제거하였고, 최영(崔瑩)의 딸은 우왕의 왕비가 되었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위 이북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평양에 나아가 왕과 함께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3만 8000명의 군사들이 압록강 위화도(威化島)까지 나아갔으나, 우도도통사 이성계가 좌도 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회군하여 요동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이성계는 원정군을 이끌고 개경을 함락시켰으며,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하였다. 그 후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의 넋을 위로하였다.
[위치]
두천사는 전라북도 익산군 팔봉면 은기리 상두부락의 마을 뒷산에 있다.
[변천]
두천사는 1780년(정조 4) 최영 장군 영당으로 건립되었으나 1871년 철폐되었다. 1900년 다시 영당을 짓고 향사를 지내다가 1961년 위패를 모시고 사당 이름을 ‘두천사(豆川祠)’라고 하였다.
[형태]
두천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현황]
두천사는 사당의 건물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향사가 끊긴 지 오래되어 곳곳이 허물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두천사는 고려의 명장 최영 장군을 모시는 의미 있는 사당으로, 끊어진 향사를 계속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