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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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世茂 |
이칭/별칭 | 경번(景蕃),소요당(消遙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조선 전기 익산 출신의 문신.
[가계]
박세무(朴世茂)[1487~1564]의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消遙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의손(朴義孫)이고, 할아버지는 박신장(朴信章)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생원 박중검(朴仲儉)이며, 어머니는 담양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다. 부인은 부사과 권잉(權仍)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박소립(朴素立)이다.
[활동 사항]
박세무는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3등 61위로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예조좌랑·예조정랑·사간원헌납·중추부경력·승문원참교·사복시부정·군자감정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 안변(安邊)부사를 역임하였다.
박세무는 아첨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성품을 지녀 당시 권세가인 김안로(金安老)를 비난하다가 마전(麻田)군수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또한 훈구파 이기(李芑)가 박세무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여러 번 자신에게 『중용(中庸)』을 배우라고 하자 이를 매우 분하게 여겨 스스로 외직인 고을 수령으로 나가기를 자원하기도 하였다.
박세무는 아이들의 학습교재였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로도 유명한데, 본래는 집안의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었지만 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두루 사용되었다. 박세무는 1554년(명종 9)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세무는 사망한 뒤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송동리에 있는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