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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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準王 |
영어공식명칭 | King Jun |
이칭/별칭 | 기준(箕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초기 국가 시대 익산 지역에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개설]
준왕(準王)[?~?]에 관한 기록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고조선 멸망 후 바닷길로 도망쳤다는 후한(後漢) 학자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 등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기자조선의 준왕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대륙에서 내란이 일어났고, 중국의 유이민들이 기자조선으로 피난해 오자 준왕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기자조선으로 건너와 준왕에게 복속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로 삼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으나 기원전 194년에서 180년 사이에 서쪽 방면의 유이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지(韓地)에 이르렀고, 스스로 ‘한왕(韓王)’을 자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한지에 대해서는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모두 금마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실학자들은 준왕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 익산 지역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라는 역사 인식론을 제기하였다. 삼한정통론은 위만이 나라를 찬탈하였으므로 기자조선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며, 기자조선의 정통성은 기준이 남쪽으로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준왕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이 지금의 익산 지역이라는 주장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재의 미륵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금마 지역과 만경강 유역에서는 청동기와 함께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고조선 세력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익산 지역에서는 익산시 계문동, 춘포면 신동리, 삼기면 오룡리·서두리, 낭산면 구평리 등 5개 유적에서 모두 13기의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이 토광묘에서는 동검·동사(銅鉈)·검파두식(劍把頭飾) 등의 청동기와, 철도자·철부·철사·철촉 등의 철기류가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 평장리에서는 목관묘로 추정되는 분묘에서 세형동검과 동모, 동과와 함께 중국 전한경(前漢鏡)이 출토되었다. 초엽문(草葉文)과 반리문(蟠螭文)이 새겨진 이 청동거울은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유적 외에도 익산시 팔봉동과 함열읍 다송리를 비롯하여 전주시, 완주군 등에서도 유적이 발굴되어 익산 지역에 후기 청동기 문화 또는 초기 철기 문화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요소들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익산 여러 유적들에서 발견된 청동기류와 철기류, 공구류 등이 북한 서쪽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높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므로 기원전 194년을 전후하여 준왕이 정착한 곳이 익산 지역에 해당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준왕과 익산의 관련성에 관한 평가]
『삼국지』나 『후한서』 등에 보이는 준왕의 바닷길을 통한 한지로의 이동 기록은 그보다 앞선 역사책인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전라북도 지역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들이 익산 외에도 전주와 완주, 군산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기 때문에 익산 지역만을 준왕의 정착지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