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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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致玉 |
영어공식명칭 | Kim Chi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10월 14일 - 김치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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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치욱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9일 - 김치욱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 김치옥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치옥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남전리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
거주|이주지 | 남전리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
활동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치옥(金致玉)[1879~1927]은 1879년 10월 14일 지금의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무단통치하에 감시가 엄중한 상황이던 1918년에 목사인 배은희(裵恩希)와 함께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하여 지하 독립운동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천도교인이 많았던 익산 지역에서는 대개 천도교 창시자 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추도일인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최제우 추도식이 끝난 1919년 3월 10일 밤 9시가 되자 익산 곳곳의 산꼭대기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고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산면에서도 박사국·이정·이병석 등이 주도하여 횃불 시위를 일으켰는데, 익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 중 하나였다. 약 200여 명의 군중은 두루마기를 잘라 “조선 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여산면 헌병분견소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김치옥은 여산면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김치옥은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에 대하여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른 것이 어찌하여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며 저항하였지만 고문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 상태에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겪다가 1927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치옥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