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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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永文 |
영어공식명칭 | Park Youngmo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10월 12일 - 박영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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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영문 이리 장닐 만세 시위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영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 박영문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출생지 | 신지리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신지리 |
학교|수학지 | 중동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활동한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영문(朴永文)[1904~1919]은 1904년 10월 12일 지금의 익산시 오산면 신지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영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귀향하여 금마면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4일에는 문용기(文容基)·장경춘(張京春)·박도현(朴道玄) 등이 주도한 이리 장날의 만세 시위에 중동학교 동기생인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과 함께 참가하였다. 기독교인과 학생 등 200여 명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중으로 불어났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원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던 박영문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9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영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