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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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榮喆 |
영어공식명칭 | Park Youngchul |
이칭/별칭 | 다산(多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일제 강점기 익산군수를 지낸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가계]
박영철(朴榮喆)[1879~1939]의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호는 다산(多山)이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박기순(朴基順)이다.
[활동 사항]
박영철은 1879년(고종 16) 2월 2일에 태어났다. 1901년 일본 동경에 있는 성성의숙(成城學校)을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903년에 일본 육사 15기로 졸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 종군하였으며, 육군 기병 참위와 육군무관학교 교원 및 교관을 지냈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군대로 돌아온 이후 12월 초까지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이재극(李載克)을 수행하며 일본 내 군사 시설을 시찰하였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육군 기병의 부관·정위·참령, 육군유년학교 부관 등을 지냈다. 1907년 7월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일본군에 복무하였다.
박영철은 1912년 전역과 동시에 익산군수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매일신보』에 만세 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실었고, 1932년 이봉창 의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에 사죄하기도 하였다. 1933년 6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였다.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상임이사, 조선농회 특별의원, 시중회(時中會) 이사를 맡았다. 1937년에는 경성 주재 만주국 초대 명예 총영사와 조선중공업회사 취체역을 맡았으며, 조선총독부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내는 등 친일 활동을 지속하다가 1939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영철의 저서로는 『아주기행(亞洲紀行)』, 『오인오선(吾人吾線)』, 『오십 년의 회고』, 『다산시고(多山詩集)』가 있다.
[상훈과 추모]
박영철은 일제로부터 훈3등 서보장,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 훈3위 경운장(景雲章) 등을 받았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