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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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獅子庵 |
영어공식명칭 | Sajam/Sajam Temple |
이칭/별칭 | 사자사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구룡길 57-125[신용리 609-1] |
시대 | 고대 |
집필자 | 김귀성 |
중수|중창 시기/일시 | 신라 내해왕 26년(222) - 사자사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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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0년 3월 31일 - 사자사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호 지정 |
현 소재지 | 사자암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구룡길 57-125[신용리 609-1] |
성격 | 사찰 |
창건자 | 불명확 |
전화 | 063-836-9480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소속 사찰.
[개설]
사자암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약 700~800m 떨어진 미륵산 장군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미륵사 창건 설화를 품고 있는 사찰로. 『삼국유사』 무왕 조 편에 백제 무왕(武王)[?~641]이 왕위에 오른 뒤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의 승려 지명을 찾아갔다가 지명의 도움을 받아 미륵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사자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하지 않아 백제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 무왕 조 편의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에서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지치 2년(1322년) 사자사조와(師子寺造瓦)’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고려 시대에도 사자사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익산군 불우조에 “사자암은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에는 사자사가 ‘사자암’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전라북도조사재료(全羅北道調査材料)』와 1928년 간행된 『익산군사정(益山郡事情)』에 “미륵산 중턱에 풍경이 아름다운 작은 암자로 신라 내해왕 26년(222)에 중수하고, 명치 40년(1907) 회진(灰塵)되었다가 재건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자암은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 준 사찰로 사자암이 자리 잡고 있는 터는 2000년 3월 31일에 사자사지(獅子寺址)라는 명칭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사자시지 발굴 조사 후 지금의 대웅전과 삼성각을 건립하였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사자암은 3만 1140㎡의 부지에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2기의 탑과 2기의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관련 문화재]
무왕의 전설이 깃든 미륵산 정상 부근의 사자사 터는 2000년 3월 31일에 ‘사자사지’라는 명칭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사자사지는 1993년 발굴 조사에서 ‘지치 2년(至治二年) 사자사조와(師子寺造瓦)’라는 글이 있는 고려 시대 암막새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사자사 터임이 확인되었다.지치(至治)는 원의 5대 황제 영종[재위 1321~1323]의 연호로, 지치 2년은 고려 충숙왕 9년(1322)이다. 발굴 당시 남북국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와 토기를 비롯하여 도자기, 불상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사자암이 조선 시대까지 사세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