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22 |
---|---|
한자 | 壬亂-石佛 |
영어공식명칭 | Buddha of Seokbul Temple, Which Blocked the Way of the Japanese Army |
이칭/별칭 | 「임란과 석불」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정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1월 21일 -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5호 지정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왜군의 길을 막은 석불사 부처」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 |
관련 지명 | 연동리 석불좌상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연동리 산220-2] |
관련 지명 | 석불사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연동리 산220-2]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
모티프 유형 | 나라를 지킨 미륵불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의 석불사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석불사(石佛寺)는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사찰이다. 마을 주민들은 석불사의 석불여래좌상(石佛如來坐像)을 미륵불(彌勒佛)이라 불렀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989년 자체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6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석불사 터에 지어진 절은 고려 시대인 12~13세기까지 법등을 이어 오다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동리 석불여래좌상은 1963년에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고 ‘석불사’로 불리다가, 1990년에 이르러 새로이 법당을 건립하고 불상을 봉안하고 삼성각과 종각·석탑·일주문 등을 지었다. 「왜군의 길을 막은 석불사 부처」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당시 나라를 지킨 석불여래좌상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왜군의 길을 막은 석불사 부처」는 2011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편에 수록되어 있다. 석불사 부처가 왜구를 막았다는 이야기는 2001년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임란과 석불」이라는 제목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수만의 군사를 몰고 익산으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면서 왜군들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왜장은 군사를 풀어서 연유를 알아보라고 하였다. 주변을 조사하고 돌아온 군사는 왜장에게 주변에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고 길가에 돌부처가 하나만 세워져 있다고 말하였다. 왜장은 짙은 안개가 낀 것은 돌부처가 왜군들을 현혹시키기 위하여서 조화를 부린 것이라 확신하며 군사를 이끌고 돌부처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칼로 돌부처의 목을 내리쳤다.
[모티프 분석]
석불여래좌상은 마을 주민들에게 미륵불로 불리었다. 미륵불은 한국인의 전통 민간신앙에서 중요 신격으로 불린다. 미륵불은 개인의 평안에서부터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 주는 신격이다. 「왜군의 길을 막은 석불사 부처」는 미륵불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내부 공동체를 지킨 이야기이며, 미륵불에 대한 한국인의 민간신앙적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