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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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聖堂倉-聖堂- |
영어공식명칭 | Seongdangchang Village Where Seongdangchang was Located During the Joseon Dynast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윤미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1년 8월 16일 - 「조선 시대 성당창이 있었던 성당마을」 안상일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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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1년 - 「조선 시대 성당창이 있었던 성당마을」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편에 수록 |
관련 지명 | 성당리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
채록지 | 성당리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
성격 | 설화 |
모티프 유형 | 마을 이름의 유래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에서 전하여 오는 조선 시대 성당창 이야기.
[개설]
「조선 시대 성당창이 있었던 성당마을」은 조선 후기 전국에 있던 아홉 개의 조창 중 가장 큰 창지였던 성당창(聖堂倉)을 보유한 성당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에 함열[익산의 옛 지명] 지역에 성당창이 설치되어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당창은 금강 하류의 설치된 득성창(德成倉)과 인접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조선 시대 성당창이 있었던 성당마을」은 2011년 8월 21일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술자는 안상일이다. 2011년 간행된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 편에 수록되었다.
[내용]
성당마을의 성당창은 조선 고종(高宗)[1852~1919] 때까지 10개 군현의 세곡을 옮기던 포구의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성당창은 8개 고을의 세미(稅米)와 2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를 모아 보관하면서 조선 후기까지 가장 큰 조창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당창에는 쌀 800석에서 1,000석을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조운선(漕運船)이 14척이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당창은 군산첨사(群山僉使)가 담당하다가, 고종 때에는 함열현감(咸悅縣監)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모티프 분석]
「조선 시대 성당창이 있었던 성당마을」 이야기는 인접하여 있는 군산이나 강경 못지않게 익산 지역이 조선 시대의 중요한 창지 중 하나였음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