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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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
영어공식명칭 | Iksanbuwongun Simunchung Leegong Myojimy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세인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이 익산부원군 이공수를 위하여 지은 묘지명.
[개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공민왕(恭愍王)[1330~1374] 때의 이름난 문신인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 이공수(李公遂)[1308~1366]를 위하여 지은 묘지명이다. 묘지명의 원제는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有元資善大夫太常禮儀院使高麗國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幷序)」이다. 이공수의 본관은 전라북도 익산이며, 1365년(공민왕 14)에 공훈을 인정받아 익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스스로 남촌(南村)이라는 호를 지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공수는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서 공민왕의 재위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1376년(우왕 2)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색은 1348년(충목왕 4)에 이공수가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사신단의 일원으로 수행하였으며, 이 일을 계기로 원나라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색이 출사하여 관직 생활을 할 때도 이공수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 간의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색이 이공수의 묘지문을 쓰게 된 것이다.
[구성]
「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은 『동문선(東文選)』 127권 ‘묘지(墓誌)’에 수록되어 있다. 이공수의 출생과 관료로서 주요 공적을 기술한 서문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서문에 이어 이공수를 송찬하는 사언시(四言詩) 위주의 명(銘)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서문에서는 이공수의 가계에 대한 설명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공수의 할아버지는 이행검(李行儉)이고, 아버지는 이애(李崖)이다. 이공수는 서른세 살 때 안축(安軸)[1282~1348]이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익산부원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직을 거쳤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솔선수범하였다. 특히 원나라 순제(順帝)[1320~1370]의 비인 기황후(奇皇后)와 사촌 간이라는 관계 때문에 원나라와 고려 왕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이 평정된 이후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최유(崔儒)[?~1364] 등과 결탁한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당시 이공수는 공민왕의 명령으로 허강(許綱)[?~1366]과 함께 표문(表文)을 들고 북경으로 향하였다. 공민왕의 복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북경에 머무는 동안 원나라 왕실의 견제와 회유, 통역관 이득춘(李得春) 등의 무고와 같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공수는 덕흥군을 따르지 않고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켰다. 결국 1364년 7월에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려던 최유와 덕흥군의 무리가 크게 패하고 공민왕이 복위하게 되자 이공수 또한 고려로 귀환하였다. 귀환 이후 1365년에 익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공민왕과 가까운 승려 신돈(辛旽)[?~1371]과 뜻이 맞지 않아 정사에 거리를 두며 지내다가, 1366년 5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들은 공민왕은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의 일체 비용을 지원하는 등 애도를 표하였다. 이공수의 부인은 김상기(金上琦)의 딸인데, 두 사람 사이에 후사가 없어서 족인의 딸을 양녀로 들였다.
묘지명의 마지막에 위치한 명문은 16구로 되어 있는데, 서문에서 기술한 이공수의 강직한 절개와 덕스러운 인품을 다시 한번 칭송하고 있다. 1구와 2구는 8언이며, 3구부터 16구까지는 모두 4언으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은 익산을 관향으로 하는 이름난 고려 문인의 역사적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고려 후기 공민왕 대의 혼란스러운 정치적·사회적·국제적 상황을 추정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