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20
한자 圓光大學校博物館所藏朝服
영어공식명칭 Court dres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의복/의복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신동 272] 원광대학교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44년 - 박주현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76년 - 박해창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10년 - 박주현 사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33년 - 박해창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7년 12월 5일 -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 기증
소장처 원광대학교 박물관 -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신동 272] 원광대학교지도보기
성격 관복|의례복
재질 견(絹)
관련 의례 조회|궁중 잔치
입는 시기 대사(大祀)|경축일|원단(元旦)|동지|조칙(詔勅) 반포|진표(進表)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전통 관복.

[개설]

조복(朝服)은 문무백관이 나라에서 열리는 조회나 잔치에서 입었던 예복을 말한다. 조복은 조근(朝覲)의 복이라고 하여, 왕이나 신하가 천자에게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문무백관이 조복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1416년(태종 16)의 일이다. 『경국대전』을 보면 백관의 조복은 양관(梁冠)과 복(服)인 의(衣)·상(裳)·중단(中單)·폐슬(蔽膝)·패옥(佩玉)·대대(大帶)·혁대(革帶)·수(綬)·말(襪)·혜(鞋)·홀(笏) 등으로 구성된다. 의(衣)는 순인(純鱗)으로 한 적초의(赤綃衣)로 깃·도련·소매 끝에 청색의 연(緣)을 둘렀으며 품계에 구별이 없이 모두 같다. 상(裳)은 적초상(赤綃裳)으로, 청연을 둘렀으며 품계에 구별 없이 동일하다. 조선 후기에는 의(衣)의 깃·도련·소매끝과 치마[상(裳)]에 둘렀던 선이 청색이 아닌 흑색으로 변화되고 사이에 가는 흰 선이 삽입되었다.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은 총 두점으로, 19세기에 중앙 관직을 역임한 박주현·박해창 부자가 2대에 걸쳐 착용한 관복이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전라북도 익산시 신동에 있다.

[연원]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은 총 두 점으로, 1967년 12월 5일 죽산박씨의 후손인 박영식(朴榮植)[1897~1977]이 적초의 한 점과 적초상 한 점을 기증한 것이다. 이 적초의와 적초상은 죽산박씨인 박주현(朴周鉉)[1844~1910]·박해창(朴海昌)[1876~1933], 2대가 착용한 것이다. 박주현은 죽산박씨 61대손으로, 고종(高宗)이 즉위하던 188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및 헌납(獻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장령(掌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룡양위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秘書院)을 지냈다.

박해창은 박주현의 장남으로서, 18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905년에는 비서감랑(祕書監郞), 홍문관시강이 되었고 경효전(景孝殿) 대축(大祝)으로 육품직(六品職)에 올랐다.

[형태]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 두 점은 적초의 한 점과 적초상 한 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작 시기는 조선 후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적초의의 깃·도련·소매 끝은 흑색을 둘렀는데, 특이하게도 저고리의 고름 색이 적색이 아니라 흑색으로 되어 있다. 적초의의 치수는 앞 길이가 100㎝, 뒤 길이는 99㎝이다.

적초상은 앞 세 폭, 뒤 네 폭이 아닌 앞 네 폭, 뒤 세 폭이고 주름의 수는 각각 스물일곱 개와 스물두 개의 선으로, 문헌과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제도를 재정비하는 시기이며 의장 제도도 간소하게 정비되는 시기였기에 적초의·적초상 또한 형태는 품계에 구별없이 모두 같았지만 색상이나 길이에서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도]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복은 죽산박씨인 박주현·박해창의 2대가 착용한 예복이다. 조복은 조선 시대 문무백관들이 대사·경축일·원단·동지라든가 조칙을 반포할 때, 진표할 때에 착용하던 관복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 후기 조복 중 적초의의 구성품으로는 반드시 적초의 앞에 늘여 무릎을 가리던 소형 폐슬 같은 것이 같은 색으로 부착되어 있는데, 죽산박씨 조복은 기증 당시부터 폐슬이 부착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제도를 재정비하는 시기로 의장 제도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정비하던 시기였기에, 조복 또한 형태는 품계에 구별 없이 모두 같았지만 색상이나 길이가 다양하게 나타난 것으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바느질법에서는 옷감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최소한의 시접[옷 솔기 가운데 접혀서 속으로 들어간 부분]으로 손쉽고 간편하게 처리하였고, 형태가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봉제법이 엿보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