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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600
한자 李崇元白牌
영어공식명칭 Lee Sungwon Baekpae|White Certificate of Lee Sungwon
이칭/별칭 이숭원 소과 합격증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미륵산1길 8[기산리 36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450년연표보기 - 이숭원 백패 작성
발급 시기/일시 1450년 - 이숭원 백패 발급
수급 시기/일시 1450년 - 이숭원 백패 수급
문화재 지정 일시 1979년 2월 8일 - 연안이씨 종중 문적 보물 제651호 지정
소장처 충간공보물제651호박물관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미륵산1길 8[기산리 367]지도보기
성격 교지
관련 인물 이숭원|문종
용도 합격증
발급자 문종
수급자 이숭원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연안이씨 종중 문적]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연안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숭원의 생원시 합격 증서.

[개설]

이숭원 백패(李崇元白牌)는 1450년(문종 즉위) 9월 5일에 이숭원(李崇元)[1428~1491]에게 발급하여 준 생원시(生員試) 합격증이다. 생원시 합격증을 백패라고 부른 이유는 글씨를 쓴 종이가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문과급제자에게는 홍패(紅牌)가 주어졌는데, 홍패의 종이는 붉은색이었다. 이숭원이 받은 백패의 크기는 세로 93.5㎝, 가로 43㎝이다. 글씨는 초서체로 되어 있다.

이숭원은 자는 중인(仲仁),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참판을 지낸 이보정(李補丁)의 아들이다. 이숭원이 생원시에 합격할 당시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이숭원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문과급제를 위한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1453년(단종 1), 즉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 장원급제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숭원은 문과급제 후 사제감주부(司帝監主簿), 정언(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吏曹正郞),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부지통례문사 겸 의정부검상(副知通禮門事兼議政府檢詳), 군자감정(軍資監正),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승지(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참찬(右參贊),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조선 시대에, 이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우두머리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에 추천되어 뽑혔다. 또 이숭원은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있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책훈(策勳)되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하여졌다. 이때 이숭원의 아버지인 이보정연천군(延川君), 조부인 이백겸(李伯謙)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의 작위를 받았다.

한편, 이숭원은 1491년(성종 22)에 예순넷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이숭원의 위패는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모셔져 있다. 충간이라는 시호의 ‘충(忠)’은 청렴방직하고 곧으며 공명정대함을, ‘간(簡)’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으며 행실이 간소함을 의미한다. 『성종실록』 22년 12월 26일 무진 첫 번째 기사에 이숭원의 졸기(卒記)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이숭원의 인물에 대한 내용을 옮겨 보면 “이숭원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청렴하고 평온하며, 공경하고 검약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할 때는 근신하고 주밀(周密)하여 여러 차례 권세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며, 비록 명예와 지위는 이미 높았으나, 집이 가난하였는데도 평안하게 살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숭원 백패를 비롯한 연안이씨 종중문적이 1979년 2월 8일 보물 제65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충간공보물제651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1450년 9월 5일에 이숭원이 생원시에 합격하여 문종에게서 받은 문서이다.

[형태]

흰색 종이 위에 검은색 글씨가 초서체로 쓰여 있다. 백패의 크기는 세로 93.5㎝, 가로 43㎝이다

[구성/내용]

이숭원 백패는 경태(景泰) 원년 9월 5일에 발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태(景泰)는 중국 명나라 제7대 황제인 경제(景帝)의 연호이다. 조선 조정에서 발급한 공식 문서에는 이처럼 중국 황제의 연호를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경태 원년은 경제가 즉위한 해의 이듬해인 경태 1년이며, 1450년이다.

백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서 맨 첫머리에 등장하는 ‘교지(敎旨)’는 왕이 내려 준 문서라는 의미이다. 교지라는 단어를 다른 줄보다 한 칸 올려 쓴 이유는 왕과 관련된 단어이므로 격을 높인 것이다. 이어서 “유학 이숭원 생원 삼등 제십팔인 입격자(幼學李崇元生員三等第十八人入格者)”라고 쓰여 있고 발급 날짜가 뒤를 잇는다. 이숭원 앞에 쓰인 ‘유학(幼學)’이라는 단어는 이숭원이 생원시에 응시할 당시의 자격을 의미한다. 유학은 어떤 관직이나 품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양반 자제들에게 으레 붙이는 말이었다.

‘생원 삼등 제십팔인 입격자’는 이숭원이 3등 제18인의 성적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의 극히 일부분 경우를 제외하고 생원시는 식년시(式年試) 때와 증광시(增廣試) 때에만 진사시와 함께 개설되었는데, 합격 정원은 생원시 100명, 진사시 100명이었다. 그리고 성적은 1등이 5명, 2등이 15명, 3등이 70명이었다. 따라서 이숭원의 성적을 요즘 식으로 따지면 100명 가운데 38등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에 과거제도가 존재한 것은 1393년(태조 2)부터 1894년(고종 31)까지의 500여 년 동안인데, 그 사이에 개설된 생원진사시는 231회였다. 식년시가 164회, 증광시가 67회였다. 이 시험을 통하여 배출된 합격자는 대략 4만 6000여 명이다. 1년에 100명이 채 되지 못하는 수였다. 합격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이숭원 홍패는 이숭원이 문과를 급제하고 받은 것으로, 1453년인 경태 4년 4월 21일에 발급되었다. “성균생원 이숭원 친시 문과 을과 제일인 급제 출신자(成均生員李崇元親試文科乙科第一人及第出身者)”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균생원’은 이숭원이 문과에 응시할 당시 성균관에 머무는 상태였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그리고 ‘을과 제일인’은 이숭원이 을과의 첫 번째 성적으로 급제하였다는 의미이다. 문과 급제자의 성적은 갑과(甲科), 을과, 병과(丙科)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이숭원이 급제할 때인 조선 개국 초기에는 갑과가 없었기에 장원인 이숭원을 ‘을과 제1인’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1453년은 단종(端宗)이 즉위한 해인데, 이를 경하한다는 의미에서 증광시 문과가 개설되었고, 바로 거기서 이숭원이 장원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숭원 백패는 조선 초기 백패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1443년 이후로 처음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지이기에 조선 전기 서지학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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