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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605
한자 李崇元佐理功臣錄券
영어공식명칭 Lee Sungwon Jwarigongsinnokgw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미륵산1길 8[기산리 36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472년연표보기 - 이숭원 좌리공신녹권 작성
발급 시기/일시 1472년 - 이숭원 좌리공신녹권 발급
수급 시기/일시 1472년 - 이숭원 좌리공신녹권 수급
문화재 지정 일시 1979년 2월 8일 - 연안이씨 종중 문적 보물 제651호 지정
소장처 충간공보물제651호박물관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미륵산1길 8[기산리 367]지도보기
성격 문서
관련 인물 이숭원
용도 상훈|임명증
발급자 성종
수급자 이숭원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연안이씨 종중 문적]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연안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숭원의 공신 임명 증서.

[개설]

이숭원 좌리공신녹권은 1979년 2월 8일 보물 제651호로 지정된 연안이씨 종중 문적 중의 하나이다. 공신녹권은 조선 시대 때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을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이다. 좌리공신은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成宗)[1457~1494]이 자신을 잘 보필하고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 준 칭호이다. 공신녹권에는 좌리공신을 책록하게 된 사유와 좌리공신들에게 내린 은전(恩典)의 세부 내용, 그리고 1등 공신부터 4등 공신까지 해당하는 공신의 이름을 모두 적어 두었다. 이숭원 좌리공신녹권(李崇元佐理功臣錄券) 역시 이숭원[1428~1491]을 좌리공신 3등으로 책록하게 된 사유와 은전의 내용을 기록하고, 1등에서 4등에 이르는 공신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숭원(李崇元)은 자는 중인(仲仁),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참판을 지낸 이보정(李補丁)의 아들이다. 문종의 즉위년인 145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니, 당시 나이는 23세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생원시에 합격한 지 3년이 지난 1453년(단종 1)에는 문과 장원급제라는 영광을 맞게 된다. 문과급제 후에는 사제감주부(司帝監主簿), 정언(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吏曹正郞),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부지통례문사 겸 의정부검상(副知通禮門事兼議政府檢詳), 군자감정(軍資監正),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승지(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참찬(右參贊),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때에는 청백리(淸白吏)[조선 시대에, 이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우두머리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에도 추천되어 뽑혔다.

이숭원 좌리공신녹권이숭원이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책훈(策勳)되고 나서 이듬해인 1472년에 발급되었다. 당시 이숭원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숭원의 아버지 이보정연천군(延川君), 할아버지 이백겸(李伯謙)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의 작위를 받았다. 한편, 이숭원 1491년(성종 22)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숭원의 위패는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모셔졌다.

[제작 발급 경위]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발급하였다.

[형태]

비단 재질로 두루마리 형태이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구성/내용]

이숭원 좌리공신녹권의 맨 마지막을 보면 ‘성화(成化) 8년 6월’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는 공신녹권이 작성된 시기를 가리킨다. ‘성화’는 중국 명나라 8대 황제인 헌종의 연호(年號)이며, 성화 8년은 조선의 성종 3년인 1472년에 해당한다. 연호를 적은 줄의 맨 위 부분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런데 이숭원이 좌리공신으로 책봉된 때는 성종 2년(1471)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종 2년 3월 27일(庚子)이었다. 이 날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심인가.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갑자기 신하들을 버리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대왕(睿宗大王)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지만 대를 이을 자가 병들고 어리므로 온 나라가 갈팡질팡하였다. 그러나 우리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께서 세조대왕을 추모하시고 여소자(予小子)를 돌아보시고 이에 큰 책명을 정하시니, 내가 들어와 큰 왕업을 잇게 되었다. 나는 부탁받은 책임이 중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오로지 몸을 삼갔는데, 이때에 신임하는 신료들이 좌우에서 분주하게 마음을 다하고 힘을 써서 오늘에 이르러, 백성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고 국가가 태평하여지니, 내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서 이에 상전(賞典)을 거행한다.”라는 성종의 전교(傳敎)와 함께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73명의 공신 이름이 적혀 있다.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는 세조(世祖)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를, ‘여소자(予小子)’는 성종 자신을 가리킨다. 이 내용을 보면 이숭원의 좌리공신녹권은 좌리공신으로 책봉되고 나서 이듬해에 발급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좌리공신 4등으로 책훈된 이숙기(李淑琦)의 공신녹권 역시 작성 시점이 1472년(성종 3)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숭원은 좌리공신 3등으로 책훈되면서 호위병인 반당(伴倘) 여섯 명, 노비 세 구, 구사(丘史) 세 명, 전(田) 스무 결(結), 표리(表裏) 한 단(段), 내구마(內廐馬) 한 필(匹)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의의와 평가]

이숭원 좌리공신녹권은 극히 드물게 전하여 오는 조선 전기 과거 관련 문서로서, 조선 시대 공신과 공신녹권의 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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