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단 가는 길에서 만난 전쟁의 자화상-소라단 가는 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05
한자 蘇羅-戰爭-自畫像-蘇羅-
영어공식명칭 A Self-portrait of War on the Way to Soradan-The Way to Sorada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덕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2년 - 윤흥길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12월 10일 - 『소라단 가는 길』 발행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소설가 윤흥길과 1950년 6·25전쟁 당시 익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소라단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

[개설]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소설가 윤흥길(尹興吉)[1942~ ]은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자주 선보였다. 연작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은 1950년대 익산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 냄으로써 당시 익산의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익산을 사랑한 작가 윤흥길과 소설 『소라단 가는 길』]

윤흥길은 익산이 낳은 가장 걸출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완장』, 『문신』 등이 윤흥길의 대표작이다. 윤흥길은 정제된 문장을 통하여 사회의 모순과 궁핍한 민족의 역사를 날카롭게 드러낸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42년 정읍에서 태어난 윤흥길은 네 살 때 부친을 따라 익산으로 이사 왔다. 이후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춘포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까지 유년기와 청년 시절을 익산에서 보냈다. 춘포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문단에서 윤흥길처럼 고향에 대한 애착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소라단 가는 길』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당시의 익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한 편의 드라마이다. 이외에도 익산의 석불사(石佛寺)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애미』, 만경강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기억 속의 들꽃』 등이 익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윤흥길의 대표작 『장마』 역시 익산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에게 ‘더블린’이 있다면, 윤흥길에게는 ‘익산’이 있다.

2003년 출간된 연작소설 『소라단 가는 길』은 익산에 대한 윤흥길의 애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은 총 11편이다. 「농림핵교 방죽」, 「큰남바우 철둑」, 「소라단 가는 길」 등은 작품 제목에서부터 익산을 위한 소설집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밖의 수록 작품들로는 「귀향길」, 「묘지 근처」, 「안압방 아저씨」,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멧돼지」, 「개비네 집」,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종탑 아래서」, 「상경길」이다.

소설은 만년에 접어든 중년 사내들의 초등학교 동창 모임으로 시작된다. 각기 사연을 가진 인물들은 익산과 얽힌 유년의 추억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풀어낸다. 익산 전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인물을 통하여 영혼과 장소가 분리되지 않은 익산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중년 사내들의 이야기 속에는 먼 옛날의 익산과 오늘의 익산이 함께 담겨 있다.

[「귀향길」 이리역폭발사고에 대한 기억]

「귀향길」은 서울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익산으로 향하는 동창들의 대화로 전개되는 단편이다. 고향 소식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몰라보게 변한 익산의 현황을 묘사한다. 이리역폭발사고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익산의 변모 과정을 보여 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허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시민들은 대충 두 가지로 보고 있지. 일차적 계기는 지난 쌍칠년도에 일어났던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 사고여. 원자폭탄 터지딧기 화약열차가 어마어마헌 파괴력으로 시내 중심부를 초토화허는 바람에 해묵은 숙원사업이던 도시 계획들을 과감허니 추진헐 수가 있었지. 그러고 이차적 계기는 수출산업공단 조성이여. 폭발 사고에 뒤이어서 공단이 들어서기 시작험서부텀 인구가 급팽창허고 돈다발이 연락절로 나돌기 시작허고…….” [「귀향길」, 14쪽]

이리역폭발사고 는 익산의 역사에 가장 큰 상처로 각인된 사건이다. 1977년 11월 11일 화약을 실은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하여 반경 500m 이내가 초토화되었다. 이리역폭발사고로 1,400여 명의 사상자와 8,000명에 육박하는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박정희(朴正熙)[1917~1979] 정부는 당시 이리 시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사고 이후 8일 만에 ‘새 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도시 건설 계획이 며칠 만에 수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폭발 사고 이후 익산의 민심을 달래는 것에는 성공한 듯하다.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폭발 사고 이후 익산의 산업 기반 시설은 비약적으로 늘어 갔다. 당시 사고를 경험한 익산 사람들은 폭발 사고로 익산이 다른 도시에 비하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체로 수긍하고 있는 듯하다. 사고 당시 삼남극장에서 공연하던 하춘화를 코미디언 이주일이 구출하였다는 둥 이런저런 가십도 생산되었다. 하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나 이재민의 고충을 생각하면 이리역폭발사고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익산 사람들은 이렇듯 이리역폭발사고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지축을 흔드는 폭음으로 과거와 현재가 갑작스럽게 단절되어 버렸다는 당혹감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만 국한된 정서는 아닐 것이다.

[「농림핵교 방죽」 유년의 기억과 순수한 이름]

1922년 설립된 공립 이리농림학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생들 대부분이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절반 이상이 초등학생들의 차지였다. 지역의 초등학생과 피란민의 아이들이 유입되어 당시 농림학교 교실 절반을 초등학생들에게 내주었다. 「농림핵교 방죽」의 동창생들은 이리농림학교를 ‘농림핵교’라고 부르며 인근 방죽에서 물장구를 치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다.

동창생들이 이리농림학교와 더불어 생각해 낸 인물은 당시 담임이었던 박경민 선생이었다. 작품에서는 좌익 인사였던 것으로 묘사되지만 선천적으로 심성이 곱고 성품이 온화한 인물이다. 박경민은 어느 날 아이들에게 야외 수업을 제안한다. 박경민은 아이들에게 ‘농림핵교 방죽’의 이름을 묻는다. 아이들은 “농림핵교 방죽이면 그냥 농림핵교 방죽이지, 생뚱맞게 이름이 뭐냐고 묻다니.” 하며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농림학교 방죽은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제가끔 제 이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요만치 크고 잘생긴 방죽에 어찌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안 달렸겄냐. [중략] 시녀지라고 부른다. 시녀지가 진짜 방죽 이름이다. 이 방죽물이 하도 맑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옥황상제님 밑에서 시중드는 선녀가 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목간을 허고 갔다는 전설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농림핵교 방죽」, 62~63쪽]

농림학교 방죽에 대한 박경민의 이야기는 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담화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농림학교 방죽은 ‘학교’나 ‘방죽’과 같은 근대적 이름이 아니라 원래 ‘시녀지’였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던 연못’이라는, 익산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붙여 준 이름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는 장면은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거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농림핵교 방죽」의 시녀지는 마냥 아름다운 대상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는 전쟁의 상처로 미쳐 버린 여자의 사생아가 시녀지로 떠내려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선녀들이 목욕을 하던 연못으로 흑인 혼열아의 시체가 떠내려갈 때 아이들은 시체에 돌을 던진다. 민족의 분열로 일순간에 비극이 가득한 세계로 화해 버린 1950년대 당시 익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큰남바우 철둑」, 『소라단 가는 길』 전쟁이 삼켜 버린 유년의 풍경]

윤흥길은 ‘큰남바우’와 ‘소라단’이라는 지역을 통하여 전쟁 당시 익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큰남바우 철둑」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은 현재 익산의 남중동이다.

“그 일대가 옛적엔 익산군 북일면 밑에 남일면 땅이었지. 그러다가 읍인가 시로 승격될 적에 남일면이 시내로 편입됨시나 남중동으로 개칭을 허게 되얐지. 그걸로 보자면 남녘에 있는 바위를 뜻허는 지명이 틀림없을 게여.” [「큰남바우 철둑」, 86쪽]

아이들은 국군[현내]과 인민군[남바우]으로 나누어 선로 위에서 담력 싸움을 한다. 기차가 육박하여 들어올 때까지 선로에 오래 누워 있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현내 대장 염무환은 결국 사고로 숨지게 된다. “나는 ……국……군이……맞……다니깨…….” 좌익 인사를 아버지로 둔 염무환이 사고로 생을 마감하며 한 말이다.

「소라단 가는 길」의 배경은 현재 익산 영등동의 소라산이다. 소라산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대량 학살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졌다. 익산의 아픈 역사가 스며 있는 장소이지만 ‘소라단[소나무 밭]’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소라딱지 모양으로 생긴 데서 붙은 지명일 거라는 둥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이름일 거라는 둥 제각각 빛깔 다르고 생김새 다른 주장들이 분분히 쏟아져 나왔다. [중략] 교장 선생의 풀이에 의할 것 같으면, 소라단의 본디 이름은 송전내(松田內)였다. 그걸 우리말로 풀어쓴 이름이 솔밭안이고, 세월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바뀐 이름이 곧 지금의 소라단이라고 고명하신 향토사학자께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소라단 가는 길」, 205쪽]

「소라단 가는 길」의 주요 인물 박충서는 황해도 사리원 출신이다. 1·4후퇴 때 가족과 헤어져 익산의 보육원에서 생활한다. 의젓하고 사례 깊은 박충서는 익산에서 나고 자란 또래 이기곤과 사귀게 된다. 소나무가 빼꼭히 들어선 소라단에서 둘은 우정을 쌓아 간다. 박충서의 꿈은 인천에서 헤어진 옥서 누님을 찾는 것이다. 헌 잡지에서 누님의 행방을 찾아낸 박충서는 천신만고 끝에 잡지에 실린 여인을 찾아가지만 누님을 만나는 데 실패한다. 소설은 박충서와 이기곤의 관계가 소원하여지면서 두 사람 모두 소라단과 멀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옛 ‘소라단’과 오늘날의 ‘소라산’은 다른 곳이다. 이러한 괴리감과 결핍감이 작품의 후반부에 나타난다. 윤흥길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남성중고, 남성여중고, 좌우지간 ‘남성’ 자 붙은 핵교란 핵교는 몽땅 다 그쪽으로 이사를 가고, 아파트 단지들이 빽빽허니 들어서는 바람에 우리 소라단 몰골도 인제는 영판 틀려져뿌렀다네.”라고 쓰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현재 소라산은 2013년 자연마당 사업에 선정되어 자연 생태 숲, 생태 습지, 생태 탐방로, 생태 체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라산’이 ‘소라단’이던 시절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의 소라산은 익산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에 충분하다.

[「개비네 집」, 「종탑 아래서」 전쟁,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

전쟁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도 사랑은 싹튼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유년 시절을 따뜻하게 품어 준 누님에 대한 얘기 두 편이 『소라단 가는 길』에 수록되어 있다. 「개비네 집」은 천일고무 사장의 딸을 흠모하였던 이진원의 추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익산시 동산동 ‘개비네 집’이다.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훗날 동중학교가 들어선 옛 공설운동장 자리와 그 아래 남성중학교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빼기에 육모정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담한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개비네 집은 육모정 바로 옆이었다. 성곽처럼 높고 튼튼한 돌담에 에워싸인 개비네 집은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서울의 궁궐을 연상케 하는 거창하니 기와지붕의 겨우 윗부분만 바깥세상을 향해 약략스레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개비네 집」, 176~178쪽.]

‘개비’는 1950년대 당시 천일고무 익산공장의 사장 별명이다. 이름에 ‘갑’ 자가 들어가서 ‘갑’을 ‘개비’라고 한 데서 연유한 별명이다. 익산 남중동에 위치한 천일고무는 당대 대표적인 고무신 회사였다. 실제 천일고무의 설립자는 이정림(李庭林)이다. 개성 출신 이정림은 1933년 고무신 도매상으로 시작하였고, 1945년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천일고무가 소설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50년대 당시 익산에 이렇다 할 산업 기반 시설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비네 집」의 주인공은 미술 선생 이진원이다. 이진원은 어린 시절 개비네 집 외동딸 금옥의 귀여움을 받는다. 금옥은 외동이로 자라 동생이 있었으면 하였다. 이진원은 개비네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양과자와 초콜릿을 잔뜩 얻어먹기도 하고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선물 받기도 한다. 금옥은 늘 이진원에게 ‘누님’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진원은 부끄러워서 누님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몇 개월이 안 되어서 익산 역시 인공 치하에 놓이게 된다. 개비네 집이 부르주아로 낙인찍혀 피란을 가게 됨으로써 이진원은 금옥과 아픈 이별을 한다.

「개비네 집」은 1950년대 당시 익산 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익산에서 가장 잘 사는 집안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당대 익산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 내고 있다. 익산이 인민군에게 점령되고 며칠 후 개비네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약탈당한다. 약탈자 중에는 이진원의 아버지도 섞여 있다. 결국 궁궐 같은 개비네 집은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탈바꿈한다. 윤흥길은 전쟁으로 하루아침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처지가 뒤바뀐 익산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이진원의 기억을 빌려 일말의 따뜻함과 애틋함을 남겨 두고 있다.

「종탑 아래서」는 이리 신광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광교회는 1946년 이리 북창동[지금의 창인동]의 일본인 농장을 인수하여 착공하였으며, 1951년 6월 완공되었다. 소설의 배경과 성전의 완공 시기가 대략 부합하고 있다. 윤흥길 또한 신광교회 신자였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바로 그때였다. 종소리가 데엥, 하고 묵중하게 울렸다. 한번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는 짧은 쉴 참을 거친 후 뎅그렁 뎅, 뎅그렁 뎅, 연달아 기세 좋게 울렸다. 명은이는 느닷없는 종소리에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종소리가 들려오는 신광교회 쪽을 향해 명은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저녁놀에 함빡 젖은 채 종소리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는 명은이 모습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리만큼 묘한 감동을 받았다.” [「종탑 아래서」, 283쪽]

「종탑 아래서」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건호네 가족은 서울에서 피란 온 막내 이모의 전도로 수복 직후부터 신광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건호는 우연한 기회에 익산군수 관사에 살고 있는 명은이를 알게 된다. 명은이는 전쟁 당시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눈이 먼 소녀이다. 신광교회의 종소리를 통하여 위안을 찾는 명은이를 위하여 건호는 교회에 몰래 들어가 신광교회의 종을 울리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종탑 아래서」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소녀에 대한 순애보를 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종교적 경험과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익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다.

[소라단은 오날날 으떤 모양으로 지내고 있는고?]

윤흥길은 『소라단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그 소라단은 오날날 으떤 모양으로 지내고 있는고?”

“오날날 박충서는 으떤 모냥으로 지내고 있을꼬?”

“그 똥판이란 여자, 결국 어떻게 되얐을꼬?”

“그 명주란 여자는 또 어떻게 되얐을꼬?”

우리가 사는 곳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준다. 고향을 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상대방의 취향, 문화적 경험, 삶의 태도 등이 장소를 통하여 이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자신도 그렇듯 타인 또한 고향에 대한 원형적 애착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할 것이다. 『소라단 가는 길』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운명이 어느 곳에 깃들어 있는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라단 가는 길』에 익산 사람들의 운명이 깃들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4.05 오탈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리역폭발사고" 항목에 근거하여, 발생시기를 9일 → 11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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