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1492
한자 裡里驛爆發事故
영어공식명칭 The Explosion Accident of I-ri st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연표보기 - 이리역 폭발사고 발생
성격 열차 폭발사고|화약 폭발사고
관련 인물/단체 신무일[한국화약주식회사[현 주식회사 한화]]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개설]

이리역 폭발사고 는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현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이다. 1993년에 발생한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와 더불어 최악의 철도사고로 꼽힌다. 전라북도의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총 1,402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재산피해의 경우 전파된 가옥이 811동, 반파된 가옥이 780동, 소파된 가옥이 6,042동 및 다수의 공공시설물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으며, 1977년 기준으로 61억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재민 또한 1,674세대 7,873명이 발생하는 등 익산시에 큰 아픔을 남긴 사건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1977년 11월 9일에 인천에서 출발한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화약열차가 폭발물[다이너마이트 914상자 22톤, 초안폭약 100상자 2톤, 도화선 1톤 등]을 싣고 광주로 향하고 있었다. 11월 10일에 이리역에 도착한 열차는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40시간 가량 대기하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급행료라는 명목의 뇌물 때문이었다. 화약류 열차는 역내에 대기시키기 말고 직통운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급행료를 낸 다른 열차들이 우선적으로 통과하면서 화약 열차의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당시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호송 직원 신무일 씨는 이리역에 항의를 했음에도 묵살당하게 된다. 결국 신무일 씨는 이리역 앞 주점에서 음주를 한 후 열차 안 침낭에서 잠이 들었다. 이때 화약상자 위에 양초를 켜두었던 것이 화약에 옮겨붙으면서 폭발사고로 이어졌다.

[경과]

열차가 폭발하기 전, 화약상자에 불이 옮겨붙은 것을 확인한 신무일 씨는 침낭을 이용하여 불을 끄려했으나 실패했고,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철도요원 및 검수원 등도 폭발을 막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허술한 안전인식은 열차의 대규모 폭발로 이어졌고, 폭발은 이리역 구내에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를 남겼다.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은 대부분 파괴었으며, 반경 4km 이내 건물은 유리창이 깨졌다. 폭발로 인한 파편이 춘포면까지 날아가고, 군산시에까지 폭발음이 들렸다는 증언도 전해 진다. 역내 시설물의 경우 이리역사는 물론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정차 중이던 기관차 등도 파괴되었다. 또한 창인동에 위치한 당시 익산군청은 폭발로 인한 진동으로 건물에 균열이 생겼다.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난 까닭에 이리시의 사람들은 전쟁이 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기자는 서울에 전화를 걸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고 당일인 1977년 11월 11일은 한국과 이란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중계되고 있었으며, 당시 데뷔 16주년을 맞은 가수 하춘화 씨와 무명 개그맨 이주일 씨가 이리역삼남극장에서 공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수 하춘화 씨는 공연이 시작한지 15분만에 사고에 휘말렸는데, 건물이 무너져내린 와중에도 개그맨 이주일 씨가 쓰러져있던 하춘화를 구해냈고, 그로 인한 인연으로 이후 대스타가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결과]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신무일 씨는 얼마 후 검거되었으며, 1978년 2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천막촌을 지어 이재민을 수용하였는데, 민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새롭게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망[남북로[3,108m], 중앙로[544m], 동서로[1,180m], 익산로[2,000m], 인북선 포장[2,520m]]이 정비되었다. 특히 모현동에는 모현주공아파트와 창인주공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이 아파트는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였다. 건물에 균열이 간 익산군청은 함열읍으로 이전하였으며, 이리고등학교남성고등학교는 현재의 익산시 신동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역 주변은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한 상황이었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인해 역 주변이 피해를 입으면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는데, 홍등가에서 일하던 관련 여성들의 피해는 공식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익산역 내에는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놓여있어 역 광장 내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기도 하다.

익산시는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을 맞아 추모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추모식과 시민합창단의 공연 및 미래비전 선포식 등이 진행되었으며, 사고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왔던 윤장현 전 광주시장이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이리역 폭발사고 는 명백한 인재사고로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철도법 제61조에서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을 실은 열차의 경우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통과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화장비의 부재와 역무원들의 현장 이탈은 이리역 폭발사고를 대규모 참사로 이어지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2008년에 개봉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는 본 사건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소설가 김남중이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간한 『기찻길 옆동네 』 또한 이리역 폭발사고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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