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06
한자 裡里-
영어공식명칭 "Iris is a mess. Are you okay in Seou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7월 11일 - 미군 폭격기 B-29기 이리역에 폭탄 투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9월 16일 - 미군 경폭격기 B-26기 이리조차장 폭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11월 11일 - 이리역폭발사고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9월 1일 - 이리역에서 익산역으로 개칭

[정의]

두 번의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한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역에 관한 이야기.

[개설]

위도 북위 약 35도 56분, 경도 동경 약 126도 56분[약 35° 56‘N, 약 126° 56’E]. 현재 익산역이 위치하고 있는 좌표이다. 이 좌표에서 27년의 시간을 두고 두 번의 대규모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1950년 7월 11일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 B-29기 여러 대가 이리역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 16일, 이번에는 미군의 경폭격기 B-26기가 이리조차장을 폭격하였다. B-29기가 중형 폭격기였다면 B-26기는 저공폭격 능력을 갖춘 폭격기였다. 이들 두 차례 폭격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27년 뒤인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폭약을 싣고 광주로 향하던 1605호 화물열차가 이리역에 정차 중 폭발하였다. 화물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 상자 36개[1톤]로 총 1,250상자[30톤] 분량이 실려 있었다. 폭발 후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웅덩이가 생겼고, 역 구내에 있던 객차, 화물열차, 기관차 등이 파손되었다. 폭발 사고로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총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가옥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등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 피해도 61억 원에 달하였다. 폭발 사고로 발생한 이재민의 수만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다. 이리역폭발사고 직후 정부는 중앙재해대책본부를 구성하여 이재민 수용을 위한 천막촌을 건설하였다.

이리역은 1995년 9월 1일 ‘익산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으며, 2014년 11월 호남고속철도에 대비한 익산역 선상(線上) 역사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2015년 4월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두 번의 대규모 폭발 사고가 있었지만, 익산역은 참혹한 아픔을 딛고 한반도 서남부의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목포에서 출발한 호남선과 여수에서 시작된 전라선, 그리고 장항으로 이어진 장항선익산역에서 하나가 된다. 익산역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이 모인 곳이며, 익산역 광장은 시민들과 여행객들에게 개방되어 상시 문화 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017년 8월에는 익산역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되었는데, 익산역의 소녀상은 다른 지역의 소녀상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달리 UN 인권결의안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다.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우리의 역사로 기억하고자 하는 익산역 광장의 소녀상은 두 번의 폭발로 희생된 익산 시민들의 마음까지도 위로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과 이리역]

익산 출신 소설가 홍석영의 단편소설 「격변의 소용돌이」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아침, 주인공이 피난을 떠나는 서울역에서 이리역까지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한강 철교가 폭격으로 끊겨 수원까지 걸어야 했던 선호는 수원역에서 간신히 남행 열차를 탄다. 열차 안에서 선호는 맹아학교 교사였던 젊은 여자와 만나 필담을 나누는데, 그 여자는 고향인 고흥으로 가기 위하여 이리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하자 선호는 여자와 함께 역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아쉬운 마음에 근처 다방에서 오랫동안 필담을 나눈다. 작가는 전쟁 중에 만난 그녀와의 인연을 이렇게 정리한다.

“결국 가슴이 찡하게 슬픈 이별을 하면서 앞으로의 막연함 만남을 기약하면서 서로 주소를 나눠 가졌지만 그게 끝이었다. 전쟁이란 격변의 시기에는 한동안의 충격적인 비극이었거나 아니면 희한한 세월의 보람이었거나 간에 지난날의 흔적으로 가슴에 찍혀 한가득 아스라한 추억거리로 남게 될 뿐이다.”[홍석영, 『홍석영 단편전집』, 모악, 2017]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난 후 현실에서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극동공군사령부 예하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 2대가 1950년 7월 11일 오후 이리시 철인동의 이리역 기관고, 평화동 변전소, 이리시 목천동[현 익산시 목천동]의 만경강 다리 등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였다. 이날 폭격으로 54명이 즉사하고, 3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이는 민간인 희생자가 빠져 있는 숫자이다. 이 날의 참화에 대해 교통부가 1953년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50년] 7월 11일은 아침부터 몹시 무더웠다. 이날 이른 새벽 이리에서 충주로 통하는 금강 상의 교각이 아군에 의해 폭파됐다. 강경, 대전과의 통신도 두절됐다. 평온했던 이리시에도 전운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통신이 두절되면서 이리 지역 철도 종업원들은 전원이 직장에 출근해 기관차를 정비해 놓고 언제 어디로라도 이동할 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취했다. 그러던 이날 오전 11시께 구름 덮인 서남방 상공으로부터 난데없는 중폭격기 2대가 나타나 이리지구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우군기 B29가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환호했다. 그러나 누가 뜻하였으랴. 지리에 어두운 우군기는 교통부 직원들의 환호를 적군으로 오인해, 역사와 운전사무소 등 철도시설은 물론 환호하는 종업원들의 머리 위에 시커먼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날, 이리 운전사무소 기술주임으로 근무하였던 설○○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B-29야, B-29야 하면서 모두들 좋아하였지요. 그러더니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으로 내려오면서 까만 덩어리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삐라다 삐라다 모두들 이렇게 외치는 순간 쾅쾅 요란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먼지와 연기에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생지옥이 되었어요. 삐란 줄 알았지 누가 폭탄인 줄 알았겠습니까.”[교통부 교통사편찬위원회, 『한국교통동란기』, 1953, 145~146쪽. 김태우,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문학』, 창비, 2015, 256쪽에서 재인용]

전쟁 초기에 발생한 이리역 폭격은 그동안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이리시를 북한군이 진주하고 있던 천안이나 수원으로 오인하여 생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태우는 “한국전쟁 초기 작성된 제5공군의 수많은 문서들은 B-26 경폭기와 전폭기가 남한 후방지역 도심의 역과 조차장 및 촌락을 폭격했음”을 강조한다. 피해 지역인 익산시 시민단체들은 지난 1999년 10월 15일 ‘미 공군 폭격에 의한 양민희생사건 대책회의’를 결성하고 이리역 폭격 사건의 피해자 접수와 동시에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발행한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가.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3시 30분 사이에 전라북도 이리시 철인동에 소재하고 있는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인근, 만경강 철교 등에 미 극동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여 이리역 근무자, 이리역 이용자, 이리역과 변전소 인근 거주민 등 91명 이상이 집단 희생되었다. 나. 이 사건으로 인한 전체 희생자의 수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조사결과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진실규명대상자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희생사실이 확인 또는 추정된 사람은 총 60명이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하지는 않았으나 기관 자료에 희생사실이 기록된 사람은 이리역 근무자 31명이다.”

채규판 시인은 익산역 광장에 세워진 ‘1950년미군의이리폭격희생자위령비’에 “역사를 되돌릴 수 없듯이/ 비극의 재연은 다시 연출될 수 없다.”라고 썼다. 모든 것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극의 현장을 역사 속에 그냥 묻어 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냥 묻어 버린 불씨는 언제라도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이리역과 사람들]

이리역처럼 같은 공간에서 27년의 시차를 두고 대규모 폭발이 두번이나 발생한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리역 폭발사고(裡里驛爆發事故)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폭발’이 지닌 상징성이다.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한국 사회는 정치적·경제적으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때 기차역은 산업화의 첨병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농촌의 젊은 노동인구를 도시의 공업단지로 이동시켰고, 생산에 필요한 원자료 등 산업 물자가 기차를 통해 이동하였다. 이리역폭발사고도 그러한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 익산의 산업화·근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폭발 사고 직후 박정희 정부는 지역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1977년 11월 19일 ‘새 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폭발을 통해 이리역 일대는 폐허가 되었지만, 폐허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향한 이리[현재 익산] 사람들의 의지는 다시 솟아났고 지금 전라선호남선이 합류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홍석영의 단편소설 「인철네 집」은 1977년의 이리역 폭발사고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인철네 집」은 폭발의 원인이나 위력 그리고 그 참담하였던 상황을 그려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대신 폭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는데, 소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몰랐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피해 현황에 집계되지 못하였던 집창촌 여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이듬해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아세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으로 이란에서 열린 축구경기가 중계방송되고 있었다. 한국의 이영무 선수의 첫 골이 터지자 방송을 시청하는 13만 명의 시민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였다. 바로 그 순간, 이리역에서 쿵쿵하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고, 그 소리와 동시에 근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멀리 떨어진 전주나 군산에서도 폭발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리역사의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고, 객화차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았다. 구내에 있던 100량이 넘는 객화차가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도 1㎞ 넘게 파손되었다.

수사 당국은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이 어둠을 밝히기 위하여 켜 놓은 촛불이 화약 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신무일은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 데도 무려 22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 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 나 술을 마셨다.”라고 진술하였다. 신무일은 객차에서 촛불을 켜 놓고 잠이 들었고, 그 사이 촛불이 넘어져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난 것이다. 초기 진화에 실패한 신무일은 현장을 이탈해 도주하였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리역폭발사고 가 인생의 전기가 된 사람도 있었다. 고인이 된 코메디언 이주일이다. 당시 22살의 인기 절정이던 가수 하춘화는 이리역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중이었다. 객석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삼남극장의 지붕이 날아가고 14명의 관객이 현장에서 죽는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당시 이주일은 하춘화를 업고 숙소에 도착하여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군산도립병원에 도착하였다. 하춘화는 우려만큼 다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뒷머리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주일은 4개월에 걸친 수술과 입원 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하였다.

소설가 홍석영은 그 참화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당시 영수네 집도 예외 없이 폭싹 무너져버렸다. 그뿐 아니었다. 어머니의 구박을 피해 어느 때처럼 구석방에 처박혀 티브이만 보던 아버지가 비명 한 번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가엾게 건물더미에 깔려 죽었다. 아아, 게다가 정말 알뜰살뜰 한 식구처럼 정겹게 가족들을 보살펴준 순남 누나가 혹독한 비명으로 그나마 사내의 시체 위에 알몸으로 겹쳐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입이 거칠고 사나웠지만, 나름대로 돋보인 미모로 손님들의 인기가 높았다는 미순이와 통통한 몸매에 약간 어수룩해 보였지만 마음씨만은 비단결처럼 고왔던 춘자 누나 등 두 명도 한 순간 주검으로 변했다.” [홍석영, 『홍석영 단편전집』, 모악, 2017]

그러나 소설과 달리 이리역 주변 집창촌 여성들의 죽음은 폭발 당시 피어올랐던 검은 연기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이리역 주변에 난립하여 있던 유흥가와 판자촌 등 불량주택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이리역사도 새로 짓고 주공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이리역 일대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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