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국호의 발상지이자 새출발, 금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07
한자 大韓國號-發祥地-出發金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법종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을 중심으로 한 만경강 유역에서 ‘대한민국’의 국호가 비롯되었다는 이야기.

[‘대한’ 국호 발상지, 전라북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국호를 정하기 위한 회의 중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라고 설명하며 1897년 세워진 대한제국 이름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제국(帝國)’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임시정부가 사용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해방 후 1948년 7월 소집된 제헌국회가 새 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그대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당시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현하였고, 1948년에 처음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는 발행일이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적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되었음을 보여 주었고 1987년 마련된 현재의 우리의 「헌법」에서도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계승 의식을 명문화하고 있다.

[대한제국, 왜 ‘조선’이 아닌 ‘대한’을 국호로 정했나?]

‘대한(大韓)’이라는 나라 이름의 유래는 1897년 10월 고종이 기존의 국호인 ‘조선’을 폐기하고 새롭게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피난하였던 아관파천 등 국내외 혼란으로 국가적 어려움이 매우 커진 상황이었다.

고종은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나라를 황국으로 일신하는 국가체제 변화를 모색하였다. 이때 기존의 국호인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부각시키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명분과 근거를 가진 새로운 국호 제정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과거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조선의 의미를 유지하면서도 좀 더 독립적인 명칭을 찾은 것이 마한·진한·변한을 총괄한 ‘대한’이라는 표현이었다. 특히, ‘대한제국 반조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대한의 의미는 단군의 고조선에서부터 여러 나라의 통합, 그리고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고려와 이를 계승한 조선 등을 대한이라는 표현으로 망라한 것이었다. 이는 삼한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고, 그 역사적 이미지가 고조선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종황제는 반조문(頒詔文)[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포고하던 조서]에서 “대한은 조선의 부정이나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단군과 기자 이래의 분립, 자웅을 다투던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나아가 마한, 진한, 변한까지 탐병(呑倂)한 고려를 이은 조선이 유업을 계승,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권리를 행하는 뜻에서 국호를 정했다.”라고 선포하였다.

[고조선 준왕의 땅 전라북도, 마한의 땅이 되다.]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초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준왕(準王)]은 반란을 일으킨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하여 한(韓) 지역에 정착한 뒤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준왕 관련 기록은 고조선계 철기문화의 유입과 삼한 사회가 철기를 바탕으로 발전한 사실로 미루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준왕의 정착지 한 지역에 대해서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비롯하여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모두 현재의 익산 지역인 금마로 비정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실학자들은 준왕의 이주 지역인 익산 지역을 강조하면서 고조선의 정통성은 위만조선이 아니라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삼한정통론을 제기하였다.

『제왕운기』에 나타난 금마는 고고학 자료를 참고하였을 때 현재의 익산시 금마면을 중심으로 한 만경강 유역 일대로 볼 수 있으며, 마한 초기 가장 강력한 소국 가운데 하나였던 건마국(乾馬國)이 부각된다. 남쪽으로 이동한 준왕 세력에 의해 철기문화가 유입되고 이후 고조선계 유민의 남하에 따른 철기문화의 확대를 통해 마한이 형성·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익산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철기 유적이 다수 존재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선진 문화가 한반도 중남부로 처음 전해진 공간이며 이를 통해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한 곳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마한의 성립 이후 진한과 변한으로 확장되어 한반도 중부 이남에 삼한이 정립되었으므로, 익산 지역은 대한민국 국호의 ‘대한’이라는 명칭이 비롯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금마면 등 익산 지역과 함께 전주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중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조선계와의 연계성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익산 지역의 초기 청동기·철기 유적과 최근 전주혁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확인된 전주와 완주 지역 청동기·철기 유적의 고조선 계통 유물은 고조선계 유민의 이주로 인하여 만경강 유역이 일찍부터 중요 거점 지역으로 성장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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