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지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23
한자 人文地理
영어공식명칭 Human Geograph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미영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 지리적 요소.

[개설]

전라북도 익산시는 한반도의 중서부, 전라북도의 서북단에 있는 시이다. 익산시는 호남선 철도가 1912년 3월 6일 개통된 이후, 신흥 교통도시로 발전하였다. 특히 철도,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가 사통팔달로 연결된 익산시는 호남 지역의 교통 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호남 지방 교통의 관문인 익산시는 마한백제문화의 출발지이자, 호남평야의 중심지이다.

[변천]

익산시는 마한의 옛터로, 건마국금마면 일대에 있었다. 백제 시대에는 금마저군(金馬渚郡)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금마저군이 금마군(金馬郡)으로 변경된다. 고려 시대에는 금마군이 익주(益州)로 승격하고, 조선 시대에는 익산군(益山郡)이 된다. 1931년 4월 1일 익산군이 익산읍으로 승격되었고, 1931년 11월 1일 익산읍이 이리읍으로 변경된다. 1947년 2월 23일에는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면서 익산군과 분리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실시되면서 이리부가 이리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5월 10일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가 되었다.

[인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통계에 따르면 1430년의 익산 지역 인구는 총 5,088명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익산군 1,623명, 함열현 1,384명, 용안현 662명, 여산현 1,419명이다. 이 인구는 오차의 범위가 클 수밖에 없다. 인구조사 목적이 과세였으므로, 인구 수에 16세 이상 60세 이하, 노비, 유랑인, 천인 등을 제외한 남자만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1916년 통계연감』에 따르면 익산시의 인구는 5만 5369명이었다. 이후 1970년에 8만 6770명, 1998년 33만 5667명, 2018년 29만 9341명이다. 1970년과 1998년을 비교하였을 때 익산시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98년과 2018년을 비교하였을 때, 익산시의 인구가 감소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도의 인구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총인구에서 한국인은 29만 4062명, 외국인은 5,279명이다. 한국인 29만 4062명 중 남자는 14만 6494명, 여자는 14만 7568명이고 외국인 5,279명 중 남자는 2,714명, 여자는 2,565명이다.

1960년대 이후에 익산시의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시기는 1980년에서 1985년 사이 6.2%, 1990년과 1995년 사이 6.4%로 집계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행정구역이 여러 차례 개편되고, 1995년에 이리시와 익산군이 익산시로 통합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별 인구를 살펴보면 2018년 기준으로 익산시의 유일한 읍인 함열읍의 인구는 남자 3,611명, 여자 3,735명으로 총 7,346명으로 집계된다. 14개의 동은 남자 11만 5315명, 여자 11만 7 236명으로 총 23만 2551명이다. 14개 면은 남자 2만 7568명, 여자 2만 6597명으로 총 5만 4165명이다. 읍과 면을 합친 인구수가 6만 1511명으로 동과 큰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익산시는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의 인구의 폭이 큰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가옥과 촌락]

익산시에서는 남향(南向)을 한 집이 대부분이다. 남향이 어려운 경우에는 동향 또는 동남향을 선택하였다. 이는 가옥의 방향에 따라 길과 흉이 결정된다고 믿음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주변 시설, 도로 등의 관계를 고려하여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옥을 지을 때 사용하는 건축 재료는 주변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주변 환경이 반영된 가옥이나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지역의 특수성은 새마을운동이 진행됨과 동시에 소멸의 길을 걷는다. 지붕 개량 사업과 농어촌 취락 개선 사업이 진행되면서 획일화되었기 때문이다. 1974년에 익산군 내의 가옥의 재료를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2만 7850호 중 88.8%에 해당하는 2만 4735호가 대부분 목재와 흙을 주재료로 삼았다. 집 지붕은 초가가 1만 4778호로 53.1%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아파트, 연립주택 등과 같은 복층화된 건물이 일반화되면서, 익산시의 공동 주택의 비중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에는 공동주택이 전체의 51.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변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가옥 구조는 사회적 지위·계층·제도·관습, 자연 환경 등에 따라 국가·지역 간에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가옥 구조는 크게 관북형, 관서형, 중부형, 남부형으로 구분한다. 이 분류법으로 보았을 때, 익산시 촌락의 가옥 구조는 남부형에 속한다. 익산시의 가옥은 ‘ㅡ’자형의 홑집이 기본형이이다. 또한 작은 창문과 온돌방, 넓은 대청마루와 툇마루를 특색으로 한다. 가옥의 규모가 큰 곳은 기본형에 칸수를 부가하여 ‘ㄱ’자 형태로 취한다. 여기에 한 칸 더 부가한 ‘ㄷ’자형은 부농의 오래된 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복층화된 건물이 들어서면서 가옥의 구조도 크게 변화한다. 마당은 주차장, 공동놀이터 등으로, 대청마루는 거실로 대체되면서 주택 내부의 구조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익산에는 전형적으로 형성된 집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오산면, 용안면, 삼기면, 황등면 같은 대부분의 면 행정구역에서는 촌락이 집촌을 형성하고 있다. 평야지대가 넓게 형성된 익산 지역에서 산촌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익산의 산촌은 미륵산함라산의 산맥이 뻗어나가며 영향을 미치는 금마면, 여산면, 웅포면의 구릉지대나 산지에 극히 일부 분포한다. 기본적으로 산촌은 경사지가 많기 때문에 농가가 경지에 따라 분산적으로 형성된다. 익산의 산촌은 전형적인 산촌보다는 소촌(疏村)에 가깝다.

익산시에는 인가가 불규칙하게 모여 있지만, 하나의 집촌 형태로 보는 괴촌(塊村)이 많은 편이다. 괴촌은 익산 지역의 자연 마을 중에서 63%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특히 삼기면오산면 등에서 괴촌 형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익산시에는 도로에 열상으로 발달된 취락인 노촌(路村)과 가촌(街村)도 존재한다. 노촌과 가촌 모두 도로와 밀접한 관련을 맺지만, 노촌은 도로 의존도가 비교적 낮은 농업적 촌락이고 가촌은 도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업적 취락이다. 익산시에서 노촌의 비중이 높은 지역은 함라면, 용안면 등이며, 가촌의 비중이 높은 곳은 황등면, 금마면 등이다.

[참고문헌]
  • 『익산시사』1(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익산시청(http://www.ik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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