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동포 구호사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90
한자 戰災同胞救護事業
이칭/별칭 전재동포 구호사업,전재민구호사업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용

[정의]

일제의 패망 후 한반도로 귀환한 해외동포인 전재동포들을 구호하는 사업.

[개설]

해방 직후 전 세계 분포되어 있는 한국인은 500만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250만 명의 해외동포들이 귀환하였다. 주로 인천과 부산을 통해 귀환한 250만 명의 해외동포들의 유입은 식량, 주택 등 기본적인 의식주 이외에도 보건위생, 물자난, 실업, 교육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형태의 문제를 야기할 정도였다. 부산과 인천을 통해 들어온 전재동포들에 대한 전반적인 구호사업은 해방 직후 한국 사회가 빨리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인들은 동북아 각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정치적 망명, 경제적 궁핍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로 이주하였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국인들은 강제적으로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다. 특히 1938년 국가 총동원령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전쟁에 동원되거나 강제 이주를 겪게 되었다. 해방 공간은 남한 인구의 10%정도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진 곳이었다.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급속한 인구 팽창의 현장인 남한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연루된 전 지구적 차원의 피해자들이었던 집단들이 해외에 있다가 귀환한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전재민, 전재동포, 귀환동포, 귀환민, 귀환전재 동포로 불렀다.

[경과]

해방 이후 250만 명 정도의 귀환 전재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각종 언론에 보도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와 사회전체가 동원되는 대규모의 구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해방 초기에는 구호 운동적 성격을 지닌 각종 대중집회와 행사가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건국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여 상당히 역동적인 대중동원의 양상을 띠었다. 구호단체의 활동, 언론사의 구호 활동, 사회단체의 구호 관련 행사, 개인의 기부 활동으로 구별할 수 있다. 1945년 8월 31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가 결성된 것을 필두로 수십 개에 이르는 구호단체가 결성되었다. 대략적으로 응급 구호, 주택 알선, 직업 알선, 귀향 협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구호 운동은 주로 개인적 행위보다는 학교, 각급 행정조직, 사회단체 등 조직을 통한 집단적 동원의 형태를 취하였다. 구호 운동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해방 후 최초의 체육대회는 구호를 위한 것이었고, 각종 연예 문화 행사, 체육행사가 구호 슬로건을 내걸고 이루어졌다. 행사 위주의 구호 운동은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구호운동이 단순한 동정심의 발로나 개인적 기부행위로 끝나지 않고 사회, 문화, 정치적 통합력을 발휘하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익산에서는 정산종사원불교 관계자들이 전재동포 구호 활동에 전력하였다. 9월 초부터 원불교가 설립한 전재동포구호회는 이리역을 중심으로 서울, 부산, 전주 지역에서 전재민 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약 7개월 동안 급식 인원이 20만 명 이상이었으며, 송도성, 유허일, 황정신행 등이 활동하였다.

[결과]

구호 운동은 일종의 민족적 자기 구명 운동 성격이 강하였다. 구호 운동 과정에서 민족적, 사회 통합적 측면이 부각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부자와 빈자의 대립이라는 결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구호 운동이 단일 민족을 강조하는 데 순기능을 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현실적인 모순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방 직후 민족적 주체로서 전재민 구호운동은 민족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운동으로 승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재민은 단일한 민족이면서 현실적으로 한반도에서 생산활동에 종사하여야 할 대상이었음이 명확해지는 운동이 전재민 구호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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