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474
한자 趙海英家屋
영어공식명칭 Cho Haeyeong's House
이칭/별칭 조용규가옥,정읍집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함열리 47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안선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조해영가옥 안채, 사랑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20년대 - 조해영가옥 일본식 양옥사랑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33년 - 조해영가옥 별채[새방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37년 - 조해영가옥 농장사랑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9월 8일연표보기 - 조해영가옥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4년 - 조해영가옥 별채[새방채] 보수, 담장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6년~2007년 - 조해영가옥 행랑채 보수, 문간채 복원, 담장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9년 - 조해영가옥 담장 보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조해영가옥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조해영가옥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함열리 473]지도보기
성격 가옥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부농 가옥.

[개설]

조해영가옥익산 김병순 고택, 이배원 가옥과 함께 ‘함라마을 삼부잣집’이라 불린다. 다른 부잣집과 달리 조해영의 선조들은 옛부터 함라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씨 집안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조해영의 고조할아버지인 조한기인데, 고종 때 사천군수와 정읍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조해영의 아버지인 조용규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18년 조해영가옥을 세웠다. 조용규는 1923년 함라마을의 다른 부자들처럼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였으며, 대륙호모공업 주식 500주를 소유하면서 대주주로서 기업 운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조해영가옥은 열두 대문 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넓은 대지 안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해영가옥은 전통 한옥이 일제 강점기에 변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고 궁궐의 건축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위치]

조해영가옥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수동마을의 중심부에 있다. 함라면사무소에서 성당 방향으로 가다가 함라파출소에서 마을 안길로 좌회전하면 조해영가옥이 있다. 주변에 익산 김병순 고택이배원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변천]

조해영가옥의 사랑채[몸채]와 안채는 1918년 건립하였다. 이후 1920년대 양옥사랑을 건립하였으나 현재 멸실되었다, 1933년 행랑채와 연결된 별채[새방채]를 건립하였다. 1937년 일본식 건물인 농장사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조해영가옥에는 사당, 동쪽채, 새집채를 비롯하여 정미소와 창고, 일꾼들과 친지들이 기거하는 여러 채의 초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6년 행랑채의 지붕을 초가에서 오늘날과 같이 개조하였으며, 문간채를 복원하였다. 2009년에는 담장을 보수하였다.

[형태]

조해영가옥은 본래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랑채[몸채]와 별채[새방채], 행랑채, 농장사랑,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기 위해 ‘ㄴ’자 형으로 담장을 쳤다. 이러한 형태의 담장은 일반적인 살림집의 담장이 아니라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담장 오른쪽으로 돌면 ‘-’자집 형태의 안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터를 화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는 22칸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화강석을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조성하고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 상부에는 화초 무늬를 새긴 물익공을 끼웠다. 창방[기둥과 기둥을 상부에서 연결하는 부재]과 장여[도리를 받치는 부재]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수장하였다. 평면은 ‘ㄱ’자와 ‘ㄴ’자를 합친 형태이며 방과 대청, 부엌, 누마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실은 툇마루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마루 끝에는 미세기문을 달거나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출입구 부분은 포치(porch)를 설치하여 강조하였다.

별채는 조용규가 큰아들 조해영이 결혼할 때 신혼집으로 지은 것으로,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농장사랑이라고 불리는 건물은 일식 건물로 주로 조용규의 아들이 친구들을 접대할 때 사용하던 건물이다. 중앙에 온돌방과 다다미방을 두고 바깥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현황]

조해영가옥은 넓은 대지 안에 사랑채[몸채], 별채[새방채], 농장사랑, 행랑채, 문간채만 남아 있다. 별채의 동쪽에는 김육[1580~1658]의 선정을 기리는 대동비가 서 있다.

[의의와 평가]

한국의 아름다운 민가정원인 조해영가옥은 일제 강점기 부농 집안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한옥의 변화 과정과 함께 외래 문화의 유입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유적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3.03 업데이트 [의의와 평가] "한국의 아름다운 민가정원" 표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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