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죽헌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57
한자 萬竹軒集
영어공식명칭 Manjukheonjip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도천마을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재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만죽헌집』 편찬
간행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만죽헌집』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한시집
저자 서익
편자 서필원|서경조
간행자 서진항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18×25.5㎝
어미 상하 이엽 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권수제 만죽헌선생문집
판심제 만죽유고

[정의]

전라북도 익산에서 사망한 조선 전기 문신 서익의 한시집.

[개설]

서익(徐益)[1542~1587]은 서천군수(舒川郡守)·안동부사(安東府使)·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의기가 투철하여 많은 이의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이이(李珥)·정철(鄭澈)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1587년 마흔여섯의 나이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도천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한시집 『만죽헌집(萬竹軒集)』이 전하고 있는데, 서익의 시는 맑고 굳세다는 평을 들었다. 시조에도 능하였는데 현재 시조 두 수가 전하고 있다. 『만죽헌집』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서익은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만죽헌(萬竹軒), 본관은 부여(扶餘)이다.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열세 살 때에 향시에서 장원을 하고 1569년(선조 2) 생원시 병과에 올라, 종부시첨정으로 순문관(巡問官)이 되어 의주로 파견되었다. 외관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기개와 절조가 뛰어나 이이·정철이 뜻이 통하는 벗으로 여겼다. 의주목사로 있던 시절 이이와 정철이 정여립(鄭汝立)의 탄핵을 받자 변호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파직당하였다.

낙향하여서는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일대에 해당하는 충청도 은진현에 은거하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高山)에 일만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號)를 붙인 정자 만죽정(萬竹亭)을 세웠다. ‘만죽정’ 당호를 걸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1587년 도천마을에서 마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지금의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다. 은진현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다가 효암서원(孝岩書院)을 거쳐 현재 행림서원(杏林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행장(行狀)을 보면, 증손자 서필원(徐必遠), 4대손 서경조(徐敬祖)가 서익의 시문이 유실되는 것을 걱정하여, 허균이 펴낸 『국조시산(國朝詩刪)』이나 『기아(箕雅)』 등의 시선집과 최경창(崔慶昌)·신백록(辛白麓) 등의 문집에 흩어져 있던 시문을 발췌하여 수집하고 편집한 것과 집안에서 입으로만 전하여 오던 시문들에 부록을 첨부하여 2권 1책으로 편집하였다. 7대손 서진항(徐鎭恒)이 1790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서익이 죽은 지 200여 년 뒤에 간행된 책인지라 시문이 많지는 않다.

[형태/서지]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은 20.5×15.1㎝, 10행 20자이다. 어미는 내향 이엽 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책의 크기는 30.4×19.6㎝이다.

[구성/내용]

권1에 실려 있는 시로는 최경창(崔慶昌)·백유함(白惟咸)·고경명(高敬命)·이산해(李山海)·권필(權鞸)·한준겸(韓俊謙) 등 교분 관계에 있던 이들에게 보낸 시가 눈에 띈다. 그다음으로 정자와 누각에 대한 시가 많이 보이는데, 평양 대동강의 연광정(練光亭)을 시작으로 임피 강극례(姜克禮)의 잠파정(蘸波亭), 제채운강정(題彩雲江亭), 강극인(姜克仁)의 강정(江亭), 차청암정(次靑巖亭), 숙장중정(宿章仲亭)을 거쳐 자신의 만죽정에 관한 「만죽정사시사(萬竹亭四時詞)」·「만죽정우영(萬竹亭偶咏)」, 끝으로 안동에 있는 귀래정(歸來亭)까지 열 수가 있으며, 대동강루(大同江樓), 함흥의 낙민루(樂民樓), 백마강루(白馬江樓) 등의 누각 시가 있다. 또한 서익이 가장 많이 쓴 시는 한양의 봉은사(奉恩寺), 하동의 쌍계사(雙溪寺), 진안의 은선암(隱仙菴), 완주의 위봉사(威鳳寺) 등 절에서 지은 시이다. 그리고 여러 승려에게 보낸 시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승려들과의 교류가 잦았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권2에는 오언고시의 운률에 따른 시와 더불어, 1585년 의주목사 시절에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고자 쓴 상소문, 묘갈명이 실려 있으며, 추부(追附)는 1564년 갑자년 병과(丙科)에 합격했던 글이 실려 있다. 책 끝머리의 부록에는 행장, 묘지명과 비명, 「갈산서원봉안제문(葛山書院奉安祭文)」, 「춘추향사축문(春秋享祀祝文)」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만죽헌집』에 실린 행장을 보면 서익이 1587년 금마 도천동(道川洞)에서 마흔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 밖에는 서익과 익산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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